와인모임 후기
꽤 운영이 잘 되는, 회원 수도 많고 모임도 많고 회원들의 충성도도 높아 보이는, 커뮤니티를 보는 안목이 있는 내가 고른 와인동호회. 역시 내 안목이 틀리지는 않았다. 운영진들은 생기는 것 없어도 열심을 내고 잦은 벙개와 읽기에도 숨차게 올라오는 모임공지, 후기, 온갖 게시판에 출석체크까지. 카페를 보면서 느낀 그대로였다. 다른 모임에 비해 모임 비용도 2~3배 정도가 드는, 그래서 그런지 얼굴에 윤기 흐르고 명함주고받기 불편하지 않고 매너가 좋아보이는 그런 모임이었다.
인원 제한이 있어서 만난 사람은 모두 11명. 운영진은 게시판을 들여다본 덕에 낯이 익고 신입 회원들은 모두 초면. 다양한 직업과 세대였다. 운영진으로 나온 한 분은 나보다 나이가 13살 정도 많은 듯했고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다 어려보였다. 회비를 송금한 후에도 계속 갈등했던 것은 그 부분이다. 어쨌든 나이차는 그다지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갔다. 와인관련 일을 하는 사람도 둘이나 있었고 공무원, 회사원, 의사 등 직업군이 다양했다.
나를 보고는 학자 느낌이 난다면서 대학이나 연구소쪽에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하하..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사람한테.. 옛날에 어느 돌팔이 점쟁이도 그런 말을 하더니. -.-;; 내 직업을 얘기했더니 그것도 어울린단다. 어쨌든 글과 관련된 일이 아니냐면서.. 말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 직업을 앞으로 몇년이나 더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직도 이 일을 하기는 하는걸까.
얘기하다가 잘 통한다는 느낌이 든 사람이 있었다. 신경과 의사라는데 직업보다는 은미의 남편이랑 생김이 아주 많이 닮아서 놀라울 정도였던 그 사람이 남성합창단 멤버란다. 오호~!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남성중창, 남성합창이 아닌가. 그래서 얘기를 좀 더 많이 하게 되었고 그 사람도 남성합창에 대해 관심갖는 사람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던지 나보고 어떻게 잘 아느냐고 묻는다. 좋아하니까 잘 알지! 일년에 한 번씩 예당에서 공연을 하는데 봄에 지나갔단다. 다음에 공연하면 초대하겠다고 했는데. 아쉽다. 다시 그 모임에 참석할 의사가 없으므로. 그런 사람이 초등 모임이나 이장네 쯤에 있었다면 좋았을 걸. 사이좋게 지낼텐데. ㅎ
신입회원 교육모임이라고 해서 나갔지만 이름과는 좀 다르게 신입이 동호회 활동에 발들여놓기 편하도록 이끌어주는 모임이었다. 인원많은 동호회에 날마다 많은 신입이 가입하는데 눈팅만 하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모임을 잘 운영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는 아주 잘하는 일이다. 다만 내 목적과는 좀 빗나가서... 물론 대화중에 와인의 기초적인 것들을 조금씩 배울 수는 있었는데 내가 이미 책으로 읽어서 아는 부분에서 더 나간 것이 없어서 특별히 내가 더 배웠다는 느낌은 없다. 모임에서 알게 된 확실한 사실은 내가 와인에 관한 책은 좋은 것을 골라서 읽었다는 것!! 역시, 책을 보는 안목도 뛰어나다는 자뻑! -.-;;
내가 생각한 결론은 한 번 읽은 책을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굴러다니게 두고 틈날 때마다 한 두 꼭지씩 더 읽어서 내것으로 소화시키는 것과 (이론) 기회있을 때마다 와인을 먹어보고 느끼는 것 (실제)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와인동호회니 뭐니 참석할 필요가 별로 없다는 것이지. 괜찮은 사람들을 만나는 건 좋은데 나는 사교 폭을 더 넓힐 생각이 없으므로 이 모임은 다시 나갈 생각이 없다. 게다가 나가보니까 혼자서 와인 한 잔씩 집에서 홀짝거리는 건 다양한 와인을 맛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고 그런 모임에서는 다양한 와인 - 그러니까 그날 7~8 가지의 와인을 먹어봤으니 - 많은 와인을 한 자리에서 비교하면서 맛볼 수는 있다는 게 장점일 수는 있다. 그러나 또 함정이 있는 것이, 와인 4종이 넘어가니까 그 다음은 비교가 잘 안되더라는 거. 말짱한 정신에 10가지를 다 먹고 평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와인은 한 잔씩 더 먹을 때마다 조금씩 더 취하게 되어 있으니까.
모임다녀와서 생각해보니 술이 매개인 모임은 분위기가 술을 많이 먹을 수밖에 없고 술 먹는 모임이니 당연히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더라. 예상에는 1차 끝내고 대중교통으로 집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와인을 천천히 마셔야 하고, 여러 종류를 맛보다 보니까 시간이 예상과는 다르게 길어졌다. 결국 인사동에서 집까지 택시를 타고 할증요금까지 무는 만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와인은 집에서, 혹은 친한 친구들과 함께 먹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집에서라면 한 종, 가족이 많은 모임이나 친구들과 함께라면 두 세 종류를 맛보면 딱 좋을 듯.
그나저나 술, 끊어야 치매에 안걸릴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