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철진이가 결혼을 했다.
1.
결혼식 전날, 막내를 만나 양복을 한 벌 사줬다. 막내보다 훨씬 어린 사촌동생이 장가를 가는데 꾀죄죄한 모습으로 식장에 나타날까봐 두려웠던 엄마는 내게 막내 양복을 한 벌 사주라고 엄명?을 내렸다. 늘 바쁘다며 만나기 힘들었는데 양복 한 벌 얻어 입을 생각이 있었는지 순순히 약속을 잡았다. 양복을 한 벌 사고보니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등산화에 등산바지, 남방을 입고 온 차림새. 셔츠도 하나 사줘야 했고 구두도 하나 사줘야 했다. 머, 내 돈으로 사주는 거 아니니 필요한 거 다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셔츠도 내 맘에 딱 드는 걸 골라냈고 구두도 정장을 전혀 입지 않는 아이인지라 캐주얼한, 발편한 구두를 골라줬다. 허시파피. 중가 브랜드쯤 되려나? 정가는 15만원 정도인데 행사하는 곳에서 7만원 정도 주고 샀다. 수십년 전에 한번 허시파피를 신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족했기 때문에 망설임없이 살 수 있었다.
날씬한 - 허리 30이 채 안되는 - 덕분에 스타일은 살아난다. 양복도 요즘 젊은아이들이 입는 몸에 꼭 붙는 스타일. 아저씨들 스타일의 박시한 디자인을 권해줬는데 그건 싫단다. 나이로 따지면 40대 중반을 넘어서는데 결혼을 하지 않은데다가 만나는 사람들이 젊어서 그런가 눈은 젊다. 다행히 몸매 받춰줘서 스타일은 살아나는데 문제는 얼굴이지. ㅋ 수원도 시골임에 틀림없다. 얼굴이 촌로같이 까만걸 보면. 양복은 아마 앞으로 한 두 번 입으면 많이 입게 될까.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어딘가로 사라지겠지만 엄마 마음에 흡족하면 그것으로 값은 충분한 것.
2.
철진이 결혼식에 새 옷 사입은 사람은 막내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엄마도, 작은 엄마들도 모두 예전에 입었던 한복, 혼주인 작은아빠 부부도 새 옷을 장만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신부가 일본인이라 신부측 하객이라고는 신부 부모 형제 뿐이었으니 결혼식이 그다지 부담스럽지는 않았을 것도 같다.
모처럼 만나는 친지들이 반가웠다. 우리 할머니를 많이 닮은 할머니의 여동생의 아들. 나는 첫눈에 우리 할머니와의 관계를 알아보았다. 그 아저씨를 보면서 할머니 생각이 나고 보고싶었다. 이제는 파파 할머니가 되어버린 아빠의 고모와 고종사촌, 이종사촌들 모두가 내 이름을 기억한다. 내가 기억해낼 수 없는 아주 어릴 적에 본 아이의 이름을. 그 이유는 내가 첫손이어서일 것인데 나는 그것이 참 고맙고 기쁘다. 집안의 맏이로 태어나 사랑받고 관심받고 조금 더 커서는 어른들 세대에 끼어 어른 대접받으며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만, 내가 맏이, 첫 손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는 미지수.
사촌, 오촌이 고만고만하게 조랑조랑하다. 나랑 밑에 동생을 제외하면 4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사이. 사촌과 오촌은 레벨이 다른데도 나이가 비슷하니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는데 나랑 내 밑에 동생만 그 자리에 끼지 못한다. 지들끼리는 집안 행사에서 만나면 반갑고 신나는 것 같은데 우리는... 어른 취급을 하는 것이지. 앞으로는 경조사도 많지 않을테니 또 언제나 보게 될까. 아빠세대만큼 자주 보고 살지 못하는 우리 세대 사촌들.
3.
다리를 다쳐 결혼식을 못보겠다는 고모가 왔다. 돈암동 아파트를 팔고 상계17단지로 왔다는 소식을 직접 들었다. 내 아파트 가까운 곳으로 오려다가 못오고 녹천역 근처로 갔댄다. 할머니가 내게는 잘하셨다. 당신 닮았다고. -.-;; 그러나 할머니는 누구에게나 냉정한 분이셨고 고모 또한 그랬다. 멀리사는 딸 하나 달랑. 혼자서 잘 지내는 줄 알고 있었는데 내 가까이 이사오고 싶어 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짠하다. 차가 없어서 대중교통으로는 불편하지만 차로는 15분 거리. 시간을 내서 가끔씩 들여다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평생 나만 위해 살아온 인생, 이제 남은 인생의 어느 부분은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내 삶이 녹록지 않아 그게 언제쯤 가능할지, 과연 가능하기나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했었다. 그랬는데 고모의 얘기를 듣고 나서 생각을 달리 했다. 내 친족, 친지, 친구들을 찾아보는 것도 봉사라고. 거창하게 봉사니 호스피스니, 언제부터 시작하느니 고민할 거 없이 그냥 지금, 주변을 둘러봐서 내가 한 번 들러주면 좋아할 사람이 있다면 들러 주는 것, 전화 한 통 넣어주는 거 좋아할 사람이 있다면 그래주는 것. (그러나 전화는 여전히 내게 어렵다. -.-) 그래보자고 생각했다. 나이들면 꼿꼿한 성격도 냉정한 성격도 변하고, 의지하고 싶어 하고 그러는 모양이다. 우리 고모를 보니.
4.
2시 결혼식. 1시 도착. 신랑신부도 아니고 혼주도 아니고 그저 사촌누나일 뿐인데, 그래서 하는 일도 없었는데 너무 피곤했다. 모처럼 하이힐 신고 서성거리며 오랜만에 만나는 친지들과 인사나누느라 피곤했을까. 예식은 친구가 사회를 보는 일반적인 결혼식이었고 축가는 친구부부와 그 아기, 셋이 불렀다. 대부분 결혼식장이 그렇듯 어수선하고 집중이 되지 않았다. 요즘 결혼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데 결혼식을 보면서 이런식으로 결혼식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여주는 결혼식이 아닌 좀더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결혼식. 별이를 이런 식으로 결혼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의미있고 추억에 남을 결혼식을 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직계가족과 신랑신부의 친한 친구들만 참석하는 결혼식. 어떤 모습으로?
얼마전 은미한테서 딸래미 결혼 청첩을 카톡으로 받고, 아니 그 이전에 다른 친구 청첩을 받고서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먼저는 갈 상황이 못되어 축의금만 보냈지만 앞으로 친구들 자녀 결혼식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 우리 세대 자녀 결혼식도 우리 부모 세대 자녀 결혼식처럼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인지. 답없는 고민만 하다가 부모 세대처럼 그렇게 흘러가고야 말 것 같은 불길함. -.-
5.
철진이는 작은 아빠를 닮아서 장난기가 있고 유머가 많다. 확실히. 그것이 아마 9살이나 연하인데다가 눈에 띄일만큼 미인인 신부를 얻은 비결이었으리라. 신혼여행을 다녀오면 일본으로 간다고 하던데 그놈, 잘 살 것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가끔 작은집에 갔다가 집에 돌아가려고 하면 이놈이 내 신발을 숨겨놓고 가지말라고 막무가내로 울곤 했었는데..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