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예요. '왜 살아?' 하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힘들어요. 그런데 '왜 자살하지 않니?' 이렇게 물어보면 핵심에 가까워져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거나 내가 사랑하는 게 있어서 우리는 안 죽어요. 우리 인간은 그런 존재거든요. (...)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때로 공감하고 때로는 정말 그럴까 때로는 지나친거 아냐? 혼잣말을 하면서. 강신주라는 이름은 들어봤으나 그가 쓴 책은 읽어본 적이 없고 이 책도 지승호가 묻고 강신주가 답한 내용을 정리해서 낸 책이라 내용은 강신주의 철학이겠지만 직접 쓴 책보다 훨씬 더 쉽게 읽혔을 것 같다. 철학자의 책이란 것이, 지루하고 딱딱하다는 근거있는 선입견이 있으니까.
검색을 해보니 철학자라고 나오고 철학박사라 한다. 어떤 사람을 철학자라고 하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을 애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철학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고 이해하고 깨우쳐 주는 사람. 읽으면서 보니 강신주는 그런 사람 같다.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작은 부분인지를 깨우쳐 주었고 누구말대로 어마무시하게 멀리 떨어진 지평 저너머에도(나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그 너머) 뭔가가 있다는 것을 -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 - 알려주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어왔던 것들, 체제, 그밖의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데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가르쳐준다. 그렇지만 나는 거기까지 찾아 보고 싶지 않다. 알고 싶지 않다. 자유인이 되면 좋겠지만 그 댓가를 치르기에 나는 너무 비겁하다.
다음에 또 강신주의 책이 보이면 읽게 될거다.
만약에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죽여달라고 하면 죽일 수 있을까요? 대개 못 죽여요. 법망에도 걸리고 감옥에도 가야 될 일이니까. 그런데 죽일 수 없으면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죽였을 때 받을 양심의 가책이 싫은 거죠. 사랑은 두 사람만 있는 거예요. 제3의 가치들, 양심의 가책, 법, 주위의 시선을 고려하는 건 관계를 맺은 게 아니에요. 나를 좀 편하게 내버려 두자는 거죠.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거예요.(웃음)
사랑은 힘든 거예요. 사랑은 이별을 감당하면서 시작하는 거예요. 언젠가는 헤어진다고요. 한 사람이 나이 들어 먼저 죽든지, 떠나든지 결국 다 헤어져요. 그것까지 생각하고 사랑하는 거예요. 헤어짐을 각오할 때 사랑하는 거예요. 사랑하려면 쉰 살 정도는 돼야 하는데, 그때 되면 힘이 빠져서...(웃음)
사람은 혼자 잘 놀아야 해요. 혼자 잘 노는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요. 사랑 찾아서 안달복달하는 사람은 어린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은 안 돼요. 나중에 자기가 지쳐버려요. 혼자 있는 사람들,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어요. 오버하고 징징거리면서 '우리 만나, 만나' 하는 애들도 얼마 못 가요. 사람이 바위 같고 산 같고 그래야죠. 애정 결핍은 다 있어요. 그걸 응시해야 해요. 자꾸 채우려고 하면 안 돼요.
제대로 못 읽는다는 건 그만큼 내 삶이 심화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조금 경험하고 조금 고통스러운 인간이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자신의 삶을 심화시켜야 해요. 인문학적 보편성은 거기서 오거든요. 책을 못 읽는 것은 비겁하게 자신의 삶을 심화하지 않고 검열하며 조심조심 살아서 그래요. 적어도 마흔이 넘으면 세계문학전집이 쉽게 읽힐 정도로 살았어야 하는데, 사랑도 제대로 못했고 권력과도 제대로 한 번 부딪쳐보지 못했으니 그게 어떻게 읽히겠어요? 물에 빠져 죽을 뻔해야 <모비딕>도 확확 읽히죠. 30, 40대 사람들에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냐고 물어보면 학창 시절에 읽었대요. 그럼 지금 읽어보라고 해요. 베르테르의 죽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베르테르가 사랑에 빠졌을 때 느낀 그 디테일한 감정의 몇 퍼센트나 당신들이 읽을 수 있냐고, 지금도 안 읽힐 거라고. 그만큼 사랑에선 비겁하게 수백걸음 물러나 있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두 가지 현실이 있는데,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이 있고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이 있어요. 순응해야 하는 현실은 죽은 거고 보수적인 거예요. 그런데 현실을 유지하면 불행해질 사람들이 거기에 적응을 해요. 이게 문제죠. 극복할 수 있는데.
제가 불편한 것은 저를 충분히 이해할 법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몰이해예요. 저는 제가 접은 인간들은 뭐라고 하든 신경 안 써요. 그런데 이 사람은 나를 이해할 것 같았는데 배신당하면 휘청휘청해요. 지금은 그것마저도 접으려고 그러죠. 계속 고독할 수밖에 없어요. 어쩔 수 없어요.
(...) 고대 이집트에 비해 지금이 진보한 게 아니거든요. 억압의 형식이 변화한 것일 뿐이죠. 거대한 건축물이 생기는 곳에는 억압이 있어요. 노예들이 채찍을 맞아가며 피라미드를 세웠지만, 자기 묘지를 만든 건 아니잖아요. 타워팰리스를 만든 노동자들도 거기서 살지는 않아요. 거대 건축물이 있다는 것은 건설한 사람들을 동원했다는 건데, 그 수단이 예전에는 채찍이었고 지금은 자본인 거죠.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체제이다 보니 상황이 더욱 교묘해졌어요. 옛날에는 노예가 탈출해버리면 됐죠. 지금은 '가서 쉬세요' 하면 불안해해요. '일하게 해주세요. 밤새도록 일할게요' 하게끔 하는 교묘한 억압 체제로 바뀐 거죠. 자본주의가 그런 거예요.
인생은 만나고 마주치며 지내는 시간이 반, 그리고 그것을 추억하는 시간이 반이에요. 그래서 만나고 마주치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시간들이 나중에 그럴 기력도 없을 때 추억의 대상이 되고 힘이 돼요. 그래서 1년이든 2년이든 사랑은 진하게 해야 하는 거예요. 나머지 시간 동안 그것만 기억할 수 있어도 살아갈 힘이 된다고요. 기생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젊었을 때 3년을 연애했대요. 그런데 기생은 결혼을 못 하잖아요. 그 후 50년이 넘도록 그 남자랑 사랑했던 추억을 가지고 산 거예요. 벚꽃이 열흘 반짝 피어도, 나머지 기간은 볼품없이 시커먼 나무로 있어도 그 기억 때문에 나머지 시간을 견디는 거잖아요. 겨우 열흘 남짓한 그 시간 때문에 벚나무라고 불리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