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음감의 소유자
1.
어제가 아빠 생일이었다.
작년 생일은 팔순이었는데 친척들에게 부담이 될까봐 가족끼리만 식사를 했었다. 모처럼의 외출에 아빠는 즐거워했고 삼남매가 다 모인 경우도 흔치 않아서 우리도 즐거웠다. 음식도 맛있었고 와인으로 내는 분위기도 그럴싸 했던 날. 그 생일이 마지막이 될 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아빠 형제들과 함께 할 걸 하는 생각은 이제야 갖게 되는 아쉬움이다.
2.
명절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기일에 우리 가정은 예배를 드린다. 아빠는, 통신과정 신학공부를 꽤 많이 하셨다. 돌아가시고 유품정리를 하다보니 여러 학교에서 받은 수료증, 졸업장이 많았다. 마지막 학교는 환갑에 졸업한 사당동쪽에 있는 학교였는데 그 연세에 수석졸업을 했었다. 오십년 넘게 교회를 다니면서 수많은 목회자를 만났지만 아마도 우리 아빠만큼 신학적 조예가 깊은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아, 물론 훌륭한 목회자들도 많지만 내가 만난 목회자 범주에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때 아빠는 예배의 인도자이며 설교자였다. 순서에 따라 묵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 성경봉독과 설교, 다시 찬송으로 이어지는 예배순서에서 보통 세 번 정도 찬송가을 부르는데 교회처럼 피아노로 반주하면서 부르는 찬송이 아니라 아빠가 부르기 시작하면 우리 모두 따라서 불렀다.
아빠는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 찬송가의 곡조가 아무리 높아도, 낮아도 아빠는 조옮김을 하지 않고 원곡 그대로, 절대음으로 부르셨다. 반주도 없이 따라불러야 하는 우리는 때로는 올라가지 않는 높은 음에서 끽끽대며 부르기 일쑤였건만 예배 끝난 후 다음부터는 첫음을 낮게 잡아달라고 해도 다음 예배에도 또다시 절대음으로 시작하신다. 아빠는 악보를 보면 반사적으로 그 음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
또, 주일날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를 드릴 때는 찬송가를 화음을 넣어 부르셨다. 가락(소프라노)으로 한 절을 부르고 테너로 한 절 부르고 베이스로 한 절 부르고.. 하하.. 나는 아빠와 멀리 떨어져 앉아 예배를 드리면서도 아빠의 테너 소리, 베이스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도 아빠처럼 소프라노, 앨토, 테너, 베이스로 한 절씩을 부른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찬송가로 예배드리는 정통예배가 나는 좋다.
아빠가 늘 공부하는 것, 교회 안에서 아빠만큼 성경을 잘 아는 사람도 기도를 잘 하는 사람도 없는 것이 나는 자랑스러웠고 4성부를 오가며 다양하게 찬송부르는 아빠가 나는 자랑스러웠다.
서른아홉에 교통사고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예배드릴 때 피아노 반주를 하는 더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었을텐데... '만약'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무한 말인가. 만약에 그 사고만 없었더라면 아빠는 더 멋진 인생을 사셨을테고 우리 가족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겠지. 가장 안타까운 건 아빠가 건박악기를 연주할 수 없었던 것. 사고 이후 풍금 앞에 앉아 좌절하던 아빠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므로..
절대음감의 소유자, 아빠 어디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