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세
매주일 교회에서 주보(소식지)를 받으면 뒷면 소천에 대한 안내를 읽는다. 1만여 명이 출석하는 교회라 당연히 한주간에도 돌아가는 분이 꽤 많은데 그걸 읽어보는 이유는 내가 아는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사망한 연령에 관심이 있어서다. 보면서 '이만하면 사실만큼 사셨네' 혹은 '가족들이 많이 안타깝겠다. 무슨 이유로 돌아가셨을까' 등등 혼자 별 소용없는 생각에 잠긴다.
지난주일,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주보의 뒷면을 펼쳐 들었는데 소천란에 104세로 돌아가신 분의 성함이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은 장수시대라 90대의 소천 소식은 거의 매주 만나는 흔한 일이지만 104세라니. 100년을 넘게 살다가 돌아가셨다는 말이지.. 하고 혼자 생각하다가는 갑자기 나도 그렇게 오래 살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계는 어떤지 모르지만 내 주변을 통해 보자면 90세 이상, 100세 가까이 장수하는 노인들은 병석에서 오래 살다가 돌아가는 경우보다는 대체로 건강하게 지내다가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병석에 누워 남의 손에 의지해 겨우 살아가는 분들은 7, 80대에 많이 돌아가는 것 같고. 뭐,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경험에만 근거한 것이기는 하지만.
내나이 이제 곧 오십. 만약에 그렇게 오래 살게 된다면 앞으로 50년을 더 살지도 모른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정말 두려운 일이다. 언제까지나 일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을테고 그래도 앞으로 12년은 더 일하고 싶은게 내 소망인데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과연 12년을 더 일할 수 있을까 의문이고 젊은 시절을 일에 치여서 바삐 살다가 지금 이정도 한가로운 것도 괴로운데 앞으로 더 한가해지거나 아예 일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그 많은 시간을 견뎌낼까 싶다.
인생 후반기를 준비하라는 얘기나 정년퇴직 후에 할 일을 생각해 보라는 얘기는 흔하게 듣는 이야기이고 나도 남에게 쉽게 말하기도 하지만 막상 생각해봐도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게 문제이다. 생각도 해보고 검색도 해보고 계산도 해보지만 너무나 막연하고 불안하다. 보고 참고할만한 실 예가 우리 세대에게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하게 장수하는 첫 세대가 우리세대이니.
요즘 티비 뉴스를 보면 자살이라는 단어를 가능한 쓰지 않는 것 같다. 전에도 그런 걸 느꼈는데 오늘 점심을 먹으면서 본 뉴스에도 자살 소식을 전하면서 발문에 자살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걸 보면. 학창시절 어느 수업시간에- 아마 스트레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나온 걸로 기억하는데 - 좁은 공간에 실험용 쥐의 개체수를 많이 늘리면 사망률이 높아진다는 실험결과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자살이 많은 이유를그 렇게 이해하고 있다.
자살은 패배자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기도 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상처가 될 것이고, 나와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감히 입밖에 낼 수 없는 커다란 죄악이지만 나는 가끔씩 자살을 꿈꾼다.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또하나의 방법으로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아닐까 하고. 내가 남의 도움 없이는 전혀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혹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의 순간만을 기다리며 살아야 할 때, 그때 나 자신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자살. 그러나 한편,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지만 과연 그때가 되었을 때 실행에 옮길 용기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자살은 죽을 때까지 꿈만 꿀 수 있는, 현실이 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라.
104세 노인의 소천 소식을 읽은 이후 꽤 오랜동안,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순리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눈감는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혹시라도 내가 염려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을 때 결단할 수 있는 용기, 실천할 수 있는 용기가 내안에 남아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