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슬리퍼

little tree 2011. 6. 10. 10:14

며칠 전부터 계속 슬리퍼 생각을 했다. 하나 사고 싶었다. 내 슬리퍼.

부모님은 내게 슬리퍼를 사 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릴 때는 넘어질까봐 사주지 않았을 것이고 조금 큰 후에는 밖에 신고 나갈 수도 없는 점잖치 못한 신발, 집에서나 질질 끌고 다닐 슬리퍼를 돈주고 구입하는 것이 아까웠을 것이다. 물자가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 슬리퍼를 살 돈이라면 좀 더 보태서 외출용 신발을 샀겠지. 게다가 우리집에는 나랑 슬리퍼를 같이 신을 사람도 없었다. 동생들도 남자라 발이 나보다 컸고 엄마도 나보다 발이 훨씬 컸으므로. 어려서부터 친구들이 슬리퍼 질질 끌고 다니는 게 부러웠다.

막상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내 맘대로 슬리퍼를 살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는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 늦게 퇴근하는 인생이 되어 슬리퍼를 신을 시간도 관심도 없었는데 별이가 생기고 난 후부터 살면서 잠깐씩 가까운 곳에 나갈 일이 생겼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 때는 빨래도 널러 나가고 그 후 아파트에 살게 되니 음식쓰레기나 각종 쓰레기 버리러 나갈 일이 종종 생기는데 그럴 때에도 외출용 신발을 신고 나가든가 아니면 커다란 별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갔다. 며칠 전 쓰레기 분리수거하러 별이 슬리퍼를 끌고 나갔다 오면서 내 발에 맞는 내 슬리퍼를 하나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사무실에는 늘 슬리퍼를 신으니까 내 슬리퍼가 따로 있기는 하다. 그동안 딱 한번 내 맘에 드는 슬리퍼를 산 적이 있다. 1995년 즈음에. 그 슬리퍼를 10년도 넘게 신다가 떨어져서 버린 후에는 별이가 신다가 작아져서 못신는, 혹은 싫증나서 못신는 슬리퍼를 갖다 놓고 신었다. 지금 신고 있는 이 슬리퍼는 내가 직접 사긴 했지만 사정이 있어서 내발에 한참 큰 260밀리 슬리퍼이다.

어제,며칠째 생각만 하고 있던 슬리퍼 검색을 해봤다. 모처럼 제대로 된 슬리퍼 하나 사볼까하다가 내가 끌고 다니는 별이넘 슬리퍼 수준이 3, 4만원쯤 하는걸 보고 값이 너무 비싸 결정을 못하고 망설이다가 보류했다. 좀더 생각해보자 하고.

퇴근 후 별이아빠의 심부름으로 매직스폰지를 사러 다이소에 가서 둘러보다가 이쁘고 귀여운 아동용 슬리퍼를 발견했다. 다이소에서 별걸 다 파네.. 하면서 살펴보니 아동용이 아니라 230밀리짜리. 신어보니 편하고 폭신한 게 맘에 들었다. 가격표를 보니 싸기까지 해. 몇 가지 색상 중에 제일 환해서 예쁜 걸로 하나 집어왔다. 흐뭇하다. 집에 돌아와서 기념으로 사진도 찍었다. 하하.. 이제 내게도 슬리퍼가 하나 생겼으니 쓰레기도 자주 버리고 상가에 있는 슈퍼에도 자주 가야지. 가끔 차로 저녁 먹으러 나갈 때도 신고 갈까? 헤헤..


(끌고 다니던 별이넘 슬리퍼와 예쁜 내 슬리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