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령 산책
우이령이 등산코스나 운동코스가 될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혼자 등산을 할 때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친구들과 등산을 할 때는 아웃풋보다 인풋이 많기 때문에^^;; 운동으로는 마이너스이다. 친구들과는 친목을 도모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또 자연을 감상하러 가는 거다. 영혼과 정신에 힘을 준다고나 할까.
우이령에 갈 계획은 한참 전부터 있었고 태경이가 예약을 해 두었다. 알제리에서부터 우이령에 가겠다고 댓글달은 진수와 나, 원성이, 태경이, 경옥이, 창일이, 혜숙이가 만났다. 원성이는 우리 친구들이 잘 아는대로 철인이고 등산을 하는 친구가 아니라 산을 가비얍게 뛰댕기는 친구이므로 산행 초보 수준인 우리들조차 우습게 여기는 우이령을 등산이나 운동으로 오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집은 안산 상록수. 그랬다. 우리는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모였던 것이었다.
지금은 콘도 공사가 한창인 그린파크 앞에 모여서 걸어올라가는 우이령은 딱 도보코스, 트레킹코스였다. 등산도 좋지만 완만한 흙길을 무한정 걸어가는 것이 나는 사실 더 좋다. 이 길이 길고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길이라면 아마 나는 매 주말마다 이 길을 걸을 것 같다. 요즘 블로그를 통해 보는 은미의 산책코스는 너무 부럽다. 서울에는 아마 그런 길이 없을 것이다. 자연이 그대로 보호되고 있는 포토맥 강변의 끝도 없는 길이 부럽다. 서울에는 그런 곳이 없다. 한강? 중랑천? 물은 있지만 나무도 없고 흙길도 없고 자연은 더더욱 없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올라오는 산책 사진을 보면 부러워 죽을 지경이다.
우이령 흙길을 둘씩 셋씩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다가 잠깐 서서 사진도 찍고 향과 맛이 기가막힌 천리향도 나눠먹고 시원하게 맥주도 한 모금씩 마시는 유쾌한 산책길이었다. 가다가 오른쪽 길로 석굴암에 가보기로 했는데 그 길이 경사도가 좀 있었다. 오르면서 보니 유격장도 있고 군사시설이라고 출입하지 말라는 팻말도 있다. 아들을 군대보낸 혜숙이와 나, 군대에 다녀온 친구들은 무심하게 지나치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무슨 생각들을 했을 것 같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대부분 그렇듯이 절로 향하는 길은 모두 콘크리트 혹은 아스팔트 길이다. 석굴암 가는 길도 예외없이 오르막인데다가 콘크리트길이라 조금 힘이 들었다. 이날 코스에서 힘든 부분은 사실 이곳 뿐이었지만. 석굴암은 기도중이었고 석굴암 마당의 커다란 장독대는 볕이 잘 들어 장맛이 좋을 것 같았다.
석굴암에서 조금 내려와 군사훈련 하는 곳 바로 옆 평평한 곳에 자리를 펴고 앉아 태경이가 준비하라 한 간단한 점심을 모두 펼쳐 놓았다. 김밥, 사과, 오렌지, 감자떡, 집에서 만든 퓨전 베이컨꼬치밥(?), 청포도, 마늘빵, 샌드위치, 골뱅이, 숯불향이나는 매운닭발, 오도독뼈, 밥... 하도 많아 기억도 다 안난다. 술은 막걸리, 복분자주, 소주, 매화주.. 갯수로 일곱병, 각 일병이다. ㅎㅎ 태경이가 싸온 오도독뼈에 밥과 김을 넣어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즉석에서 주먹밥을 만드는데 맵긴 해도 맛은 좋았다. 그 많은 음식을 거의 다 먹고 마지막에 몇 개 남은 골뱅이는 손가락접기 게임으로 걸린 친구에게 먹이고..(이거 상이야 벌이야?)
배부른 상태에서 다시 우이동 쪽으로 걸었다. 가는 길은 거리가 좀 되는 것 같더니 돌아오는 길은 너무나 짧다. 우이동으로 내려와 결혼식에 참석하고 시간맞춰 온 선희가 합류해서 두부집으로 갔다. 배는 부르니 두부김치와 녹두전만 시키고 술을 마시며 대화를 이어간다. 나는 배가 불러서인지 피곤해서인지 비몽사몽 입을 열기가 힘이 들었다. 여덟명이라 두 개의 모둠이 자연스레 형성되고 두 가지의 주제로 대화가 이어진다. 나는 그 경계에 앉아서 왼쪽 대화내용도 아스라히, 오른쪽 대화내용도 아스라히 들으며 눈을 뜨고 졸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비몽사몽하다가 원기를 회복하여 나중에는 대화에 좀 끼어든 것도 같고.
창일이 먼저 일어나 인사동으로 일하러 가고, 조금 더 있다가 여섯시 즈음이었을까 두부집을 나서 혜숙이는 집까지 걸어간다고 가고 남은 친구들은 버스를 타려는데 우리의 원성이, 그쯤에서 끝내는게 서운한 듯 버스를 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미아역에서!!를 외치고 일단 버스에 타서 선희와 태경이는 그냥 가고 진수, 나, 원성이가 수유시장 송원횟집으로 가기로 했다. 미영이에게 전화를 걸어 일찍 퇴근하라고 허락해주고. ㅋㅋ
수유시장에서 내려 횟집에 들어가 또 한잔. 진수는 늘 유쾌하다. 알제리에서 3개 국어로 소통한 무용담을 풀어내는데 어찌나 재미있던지. 미영이도 오고 미영이 남푠님도 합류해서 그냥 헤어지기 섭섭함을 달래고 그곳을 나와 미아역 우리동네까지 함께 걸어와서 나는 집으로 다른 친구들은 전철을 탔다.
집에 돌아오니 9시 40분쯤?? 집 나간지 12시간이 휠 지나서야 겨우 집에 도착해보니 별이아빠는 도봉산 등산다녀와서 청소도 깨끗하게 해 놓고 내가 부탁한 꽃게탕을 끓여놓았다.아함, 씻기만 하면 편안하게 쉴 수 있구나.
태경이가 담근 술, 복분자를 쥬스병으로 한 병을 가져왔는데 그게 어찌나 맛있던지. 알코올 냄새는 안나고 복분자 액, 복분자 주스같은거라. 참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복분자의 향기를 오래오래 간직하려고 다른 술은 일체 안먹었다. 태경이는 참 볼수록 신기한 친구라. 밖으로 나댕기는 친구가 그렇게 살림도 잘 하니.. ㅎㅎ
이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퇴직 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고 노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아직은 우리가 일할 수 있으니 다행이고 어느 순간 일을 그만둬야 할 때가 오겠지만 그 때가 되면 또 친구들하고 지금보다 더 자주 보면서 함께 늙어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나눈다. 직장생활도 자식 키우는 것도 앞으로 살아갈 궁리 하는 것도 다 힘들지만 가끔씩 친구들과 만나 대화하고 유쾌하게 웃고나면 또 새로운 힘이 나는 것 같다.
유쾌했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