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디어 한나

little tree 2012. 10. 17. 15:29

 

 

 

 

디어 한나

 

      드라마 / 영국 / 패디 콘시딘 감독

 

문화특강 세 번째 영화는 디어한나였다. 올 봄이었는지 작년이었는지 이 영화가 예술영화관에서 상영되는 걸 알고 보고 싶었는데 늘 그렇듯이 생각만으로 지나가고 말았다. 이번에 볼 영화가 디어한나라는 메시지를 받고 내심 기대했다. 문화특강 일곱 편의 목록에는 끼어있지 않아서 예상밖이었다.

 

Dear. 한나.
 시간이 좀 걸렸소.
 글 솜씨는 없지만 궁금해서 몇 자 적어요.
 내가 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전에 왜 왔냐고 물었을 때 내가 대답 안 했죠?
 신을 보러 간 건 아니고
 당신을 보러 갔어요
 나한테 웃어 주는 사람은 샘과 당신밖에 없어서…

 - 조셉의 편지 中 
 
<디어 한나>는 영화 시작부터 거칠고 친절하지 않은 장면들로 화면을 장식한다. 폭력과 분노를 자제할 줄 모르고 자기파괴에까지 이르는 조셉의 행동들은 어딘가 위태롭기까지 하다. 이 불안한 남자가 어떤 사고를 칠지, 장면마다 마주하게 되는 조셉의 모습은 관객의 가슴을 졸이며 온몸에 힘을 주게 한다. 그러다 조셉에게 구원자가 되어 준, 기독교 자선가게에서 일하는 여인 한나와의 만남이 전개되면서 영화는 조금씩 움추려진 긴장을 풀게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그토록 밝게 느껴졌던 한나가 어두운 비밀을 숨기며 살아왔음이 드러나고, 더불어 그녀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목격하면서 관객은 혼란과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간의 긴장은 그녀의 아픔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조셉이 한나에게 건네는 말들로 이완되고 그 풀어진 자리를 먹먹함으로 채워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패디 컨시딘 감독은 사는 환경부터 신분까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을 ‘상처와 외로움’이라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공통점을 만들어 한 자리에 불러 모은다. 그리고 다른 성질의 둘을 같은 하나로 합치고 여기에 반전의 묘미를 선보여 관객으로 하여금 이 놀라운 광경에 감탄하게 만든다. 홀아비 실업자이자, 술꾼이며, 더러운 성질의 조셉과 기독교인으로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듯 보이는 여인 한나. 이 둘이 함께 할 때 한나는 조셉의 영혼을 구언해 줄 유일한 사람이다. 그녀는 조셉의 거칠고 거대한 크기의 분노를 다스리고 그에게 따뜻함을 선사하며 친절로 감싸준, 그런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평안을 찾은 조셉이 한나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상황은 역전된다. 그간 수면 아래 있던 진실, 바로 한나의 남편 제임스가 무자비한 폭력과 학대로 짓밟아온 사실들이 드러나게 되면서, ‘한나’라는 여인이 겉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처럼 조셉의 삶 속에 파고들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셉은 자신에게 구원자가 되어 준 그녀가 보이지 않는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닌 눈 앞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이라는 것과 함께, 그녀에게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조셉 자신임을 알게 된다. 
 
외롭고 상처받은 두 영혼이 만나 서로의 고통을 감싸 안으며 마침내 서로를 구원하는 기적과도 같은 과정을 강렬한 울림과 깊은 호소력으로 담아낸 <디어 한나>는 누군가의 조용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긴 여운을 선사하면서 가슴 속 깊숙한 울림을 전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기댈 것 없는 막장인생이나 부족할 것 없고 행복한 인생을 살 것 같은 인생이나 내면에 가지고 있는 상처나 외로움은 다 똑같은가보다. 또 악하다고 인정받는 사람의 마음 속에도 죄책감과 후회, 돌이키고 싶은 마음은 존재하는 것 같고. 조셉이 한나를 만나서 조금씩 변해가기 전, 아무데서나 분노를 표출하며 거칠게 살아가는 순간에도 조셉 마음 깊은 곳에 죄책감과 후회가 숨어 있는 것이 보였다. 속 깊숙히 그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한나의 위로와 기도에 변화가 일어났던 게 아닐까.

 

주인공 이름은 구약성서의 한나에서 따온 모양이다. 한나는 구약에 나오는 한나처럼 아이를 간절하게 원하나 낳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성서 속 한나는 간절한 기도로 나중에 사무엘을 낳았다. 택시에 타면 흔히 볼 수 있는 무릎꿇고 두손 모으고 기도하는 소년이 바로 사무엘이다.) 성서 속 한나는 자식이 없어서 괴로울 때도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나 영화 속 한나는 의처증에 변태 남편으로부터 폭행과 학대를 당하다가 우발적으로 남편을 죽이게 되고 자신이 위로하고 기도해주던 조셉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한나가 남편으로부터 받는 학대 장면은 인터넷 뉴스나 여성전용 커뮤니티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고 그런 남편을 떠나지 않고 그가 주는 고통을 감내하는 한나에게서 학대에 길들여져 무감각해진 여자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저지른 우발적 사고도 이해가 가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한동안 지냈던 시간들도 이해가 간다. 한나의 내면은 정상이 아니었다.

 

조셉을 위해, 조셉의 죽어가는 친구를 위해 기도하던 한나, 자선가게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독실한 신자인 듯한 한나가 남편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화를 내며 예수의 초상화를 향해 물건을 집어던지는 장면에서 이것이 신앙의 변절을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해 봤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때때로 자기가 믿는 신을 향해 기도하는 대로 들어주지 않는다고,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화낼 때가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다 신앙의 변절은 아니니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때때로 신을 자기의 종인양 오인하기도 하고 신앙생활에도 오르내림이 분명 있다.

 

가진자와 못가진자, 배운자와 못배운자,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다른 것 같지만, 들어가는 집이 다르고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이 다르고 입고 다니는 옷이 다르고 타고 다니는 차가 다를지는 몰라도 내면의 모습은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상황의 사람이라도 타인을 위로할 수 있고 타인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걸까. 기독교가 이미 쇠락한 영국에서 이 영화는 어떻게 읽혀질까. 상처를 치료하고 구원하는 방법이 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예술영화일 것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간섭하는 보이지 않는 손길을 인정한다면 이 영화는 예술영화이면서 종교영화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간 세월이 흐른 후 조셉이 한나에게 쓴 편지가 나레이션과 함께 올라가고 마지막은 교도소에서 조셉과 한나가 만나는 장면인데 조셉과 한나의 표정과 화면이 모두 평화로워서 안도했다. 영화를 보고 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끊임없이 여러가지 생각을 떠오르게 만들어주는 괜찮은 영화였다.

 

문화특강을 함께 듣는 인원이 15명 쯤 되는데 참석률은 50~70% 정도다. 나이는 나보다 어린 사람보다는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든 사람들이 월등히 많은 것 같은데 이 영화를 본 날은 다들 나보다 연상인 것 같았다. 나는 무심히 이해하면서 본 영화를 다른 분들은 대부분 크고 작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야기나누는 시간이 조금 답답했다고나 할까. 내가 이단아 같은 느낌이었다. 머, 이단아 일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