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토요일 저녁, 해야할 일은 모두 마치고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
나는 그런 시간이 좋다.
그 시간이 좋은 이유는, 머지않아 별이가 돌아오고 별이아빠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거다.
곁에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 끝없이 계속된다면 그 시간이 좋을 리가...
저녁 6시가 넘어서부터 영화를 봤다.
대체로 영화를 보려면 어떤 영화를 볼까 한참을 고르는데 지난 토요일은 연달아 본 두 편을 모두 한 눈에 골랐다.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 결국 보지 못한 영화를 검색 첫 페이지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2.
아무르
드라마 /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 127분 / 2012.12.19 개봉
미카엘 하네케 감독 / 장 루이 트린티냥, 엠마누엘 리바, 이자벨 위페르...
행복하고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던 음악가 출신의 노부부 조르주와 안느. 어느 날 아내 안느가 갑자기 마비 증세를 일으키면서 그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달라진다. 남편 조르주는 반신불수가 된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보지만, 하루가 다르게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그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
영화는 딱 내 부모의 현재 이야기였다. 그리고 내 미래의 이야기가 될테고.
평생을 평화롭게 해로해오던 노부부. 어느날 아내는 반신불수가 되고 남편은 그 아내를 극진히 돌본다. 머리를 감기고 음식을 준비하고 운동을 시키고 약을 챙겨주고 화장실 출입을 도와주고...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는 더 나빠져 음식을 떠먹여야 하고 기저귀를 갈아채워야 하고 모든 것을 일일이 해주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 병든 몸 때문에 마음마저 병들어버린 아내를 바라보며 위로하는 것도 큰 부분이다.
도우러 오는 이웃과 복지사도 있고 딸도 가끔 오지만 80대 노인이 해내기에는 너무나 힘들어 보였다. 가끔씩 드나드는 딸은 아버지를 채근하며 엄마에게 더 나은 상황을 제공하라 하지만 딸 자신도 아무런 해법이 없고 도움도 안된다. 노화는, 죽음은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니.
노부부는 사랑의 표현은 별로 없지만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음악가의 길을 함께 걸어왔다는 사실과 딸의 기억을 통해 부부가 서로 사랑했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늙은 남편이 헌신적으로 자신의 모든 시간과 힘을 들여서, 아내가 원하는대로 요양병원에 보내지 않고 돌보는 것을 보면 그 부부의 사랑과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가 알 수 있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남은 인생의 대부분을 오로지 병수발에 집중하면서 희망도 없이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일상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보다 더 헌신적인 내 엄마를 봐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영화에서는 아내가 병들고 남편이 수발을 하는데 반해 우리는 아빠가 거동이 힘들고 엄마가 수발을 든다. 자신을 건사하기도 버거운 늙은 엄마는 예전처럼 고분고분하지 않다. 아빠한테 짜증내는 장면을 나는 몇 번 목격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으며 앞으로도 엄마가 늘 아빠를 돌봐주었으면... 요양원에는 보내지 말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현명한 영화 속 남편은 인생에서 다음 단계를 알고 있었으며 묵묵히 받아들였다. 현실 속 우리는 그것이 쉽지 않다. 나는 이론적으로 그 과정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입장에 있는 내 부모는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솔직히 나 자신도 그 나이가 되고 그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남편은 고통스러워 하는 아내 옆에서 아내의 손을 쓰다듬으며 긴 시간 옛날 이야기를 해주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잠든 아내의 얼굴에 베개를 덮어 숨길을 막아 죽인다. 고통스러운 소리, 버둥거리는 다리, 그리고... 옷장에서 드레스를 골라 입히고 꽃을 사다가 아내를 단장을 한다.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서재에 들어가 글을 쓴다. 글을 쓰며 서.서.히....
병에 대한 깊은 경험없이 사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누구나 생로병사를 경험할거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많다. 생.로.병.사.를 경험하게 될 때에 나 자신의 내면을 깊이 관찰하고 싶다고. 그리고 그것을 글로 쓰고 싶다고. 마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교수처럼. 영화 속 남편은 무엇에 대해 글을 썼을까. 누구에게 글을 썼을까.
3.
아무르가 끝난 시간이 9시 즈음이었던 것 같다. 별이와 별이아빠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은 11시 15분쯤. 조금 짧은 영화라면 한 편 더 봐도 되겠다 싶어서 리모콘을 집어 들었는데 첫 화면에서 바로 보이는 영화 콰르텟. 이것도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보지 못했던 영화다. 러닝타임도 짧아서 잘됐다 싶었다.
4.
콰르텟
코미디, 드라마 / 영국 / 98분 / 2013.3.28 개봉
더스틴 호프만 감독 / 매기 스미스, 마이클 갬본, 빌리 코놀리, 폴린 콜린스, 톰 커트니...
과거 사랑의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테너 레지, 분위기 메이커 호색한 베이스 윌프, 정신은 오락가락하지만 소녀같이 순수한 알토 씨씨. 이들은 한 때 세계적 명성을 날리며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던 오페라 가수들이지만 이제 모두 은퇴하고 비첨하우스에 모여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에 막강 포스의 슈퍼스타 소프라노 진이 새 게스트로 출현하고…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드림팀이 30년 만에 한 자리에 뭉쳤다!
은퇴한 음악가들이 모여 사는 비첨하우스는 내 눈에 낙원처럼 보였다. 정원이나 실내 곳곳에서 연주로 소일하는 음악가들과 아름다운 풍경. 그러나 늙고 까칠한 음악가들의 실생활은 질투와 다툼 등 다른 늙은 사람들의 일상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그곳이 참 좋아보였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늙어 함께 모여산다면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내 노후도 비첨하우스 같은 곳에서 나와 잘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늙어가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잘 늙어가고 싶어하는 레지, 누군가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착하고 순수한 씨씨, 내가 보기에 농담과 유쾌함이 지나쳐서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결국 진지한 면을 보여주는 윌프, 최고의 소프라노의 명성을 날리며 12번의 커튼콜을 받았던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진, 그랬던 자신이 자선단체의 도움을 받아 비첨하우스에 오게 된 것에 자존심상해 하던 진, 그러나 진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계속해서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개성 만점의 네 주인공과 다른 많은 음악가들, 그리고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참 좋았다. 콰르텟을 연주하러 들어가는 순간, 과거 한 때 남편이었던 레지는 진심으로 사과한 진에게 프로포즈한다. 늙은 사람에게도 아름다운 미래는 있다.
어쩌면 저렇게 분장을 잘 했을까. 과거의 미모가 남아 있으면서도 얼굴 가득한 주름과 손등의 힘줄 등.. 검색해보니 진은 34년생, 씨씨는 40년생이다. 나이먹은 배우들의 멋진 영화.
5.
연달아 본 두 편의 영화가 우연하게도 늙은 음악가들의 얘기였고 늙어감에 대해, 생로병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아무르는 많은 부분이 집안을 배경으로 해서 어둡고 우울했으나 콰르텟은 사람들의 감정하고는 별개로 집 안팍이 모두 밝고 아름다웠다. 거기에 흐르는 아름다운 음악들..
꼭 보고 싶었던, 그러나 짧은 상영기간으로 놓쳐버린 영화를 만난 주말 저녁. 영화를 본 순서도 완벽했다. 우울했으나 우울하지 않았던. 덕분에 끼니도 건넌 배고팠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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