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택시를 타고 거의 정확하게 5시가 다 되어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차 두 대에 나눠타고 출발, 6시 40분쯤 어느 휴게소에 들러 준비해온 아침을 먹었다. 국과 밥에 한 두가지 반찬이 있었으나 일상을 벗어나면 반항하려 하는 내 생체를 위해 국물에 밥만 조금 말아 먹었다. 글고 보니 내가 평소에 아침을 먹는 시간일세.
덕유산으로 가는 차안에서는 영화 숨바꼭질을 켜놓았다. 이미 본 영화인데다가 무서워서 보지 않으려 외면했지만 측면으로 보이는 화면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는 터, 영화를 띠엄띠엄 볼 수밖에 없었는데 보면서 영화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다시 보면 놓친, 새로운 부분이 눈에 보이는 법이다.
9시부터 곤돌라가 운행한다고 하는데 도착해 보니 9시 전인데도 이미 운행중이었다. 경옥이가 준비한 음식과 취사도구를 나눠 지고 곤돌라를 타려는데 생생정보통 VJ가 같이 타자고 한다. 두 대의 곤돌라에 나눠탔는데 내가 탄 곤돌라에 VJ들이 같이 타고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인터뷰하면서 올라갔다. 속살이 다 드러나는 겨울산은 흑백의 동양화.
곤돌라에서 내려 아이젠을 착용하고 배낭을 고쳐매는 장소는 노천이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다 노천. 아래 평지에서 거의 산꼭대기까지 곤돌라로 한번에 이동하다보니 그 차이는 엄청났는데 처음이라 그 예상을 못했고 몸도 적응이 안된 상태였다. 눈보라인지 눈안개인지 세차게 불어대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 곳에도 바람 피할 곳이 없다. 갑자기 히말라야에 내동댕이쳐진 느낌. 눈앞의 풍광이 그랬다. 티비에서 보던 히말라야. 나는 곤돌라에서 내리자마자 겁을 집어먹었다.
장갑을 뺄 수가 없다. 선물받은 따뜻한 장갑을 끼고 있어도 손이 얼어붙는 것 같아서. 덕분에 사진을 단 한 장도 찍지 못했다. 손이 꽁꽁, 발이 꽁꽁, 얼굴이 꽁꽁. 하체도 모두 냉동이 되는 것 같았다. 아아, 이렇게 추운 건 생전 처음이야. 우리 별이가 백골부대에, GOP에 있을 때 이렇게 추웠을까? 말이 별로 없는 별이가 집에 왔을 때 그런 말을 했다. "손 발만 시리지 않으면 그래도 괜찮은데 손 발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 손 발이 어떻게 될 것 같은 이 느낌, 이 느낌을 별이가 두 번의 겨울동안 느꼈다는 것이지.
눈쌓인 겨울산이 처음은 아니다. 아이젠만 신으면 어느 계절보다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눈쌓인 덕유산도 그랬다. 미끄럽거나 걷는게 힘들지는 않았다. 다만, 추위. 추위가 문제였다. 향적봉으로 오르는 길지 않은 동안 추위 때문에 무릎의 불편함이 느껴졌다. 늙으면 따뜻한 곳에서 살아야 하는데.. 아, 정녕 이 상태로 대 여섯시간을 버틸 수 있단 말인가. 이러다가 여기서 동사하는 것은 아닐까. 저 산 아래 마을에 내려가보지 못하고...
여까지 왔다는 증거를 남겨야 해서 사람 많은 향적봉에서 틈을 비집고 인증샷을 찍어댔다. 그 추위에 사진 찍겠다고 기다리는 사람들... 낯설지만 이해는 된다. 나같은 사람, 처음 온 사람이라면 꼭 인증샷을 남겨줘야 하니까. 친구들과 찍은 사진은 눈보라가 제대로 느껴진다.
대피소로 내려가서 테이블을 하나 확보, 자리를 잡았다. 태경이가 가지고 온 자동차커버용 비닐을 하우스처럼 치고 그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준비해간 음식을 펴놓고 먹기 시작. 김치전과 과메기, 취향별 술. 테이블 가운데에는 버너를 피웠다. 이쯤에서 생생정보통이 또 우리 비닐하우스로 찾아와 촬영을 하고... 혹한, 노천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의 부러워하는 탄성소리를 들으며 먹고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이쯤에서 찌개를 끓여 밥을 먹어야겠다고 찌개거리를 찾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것이 누구의 배낭에도 들어 있지 않은거라. 밑에 필요없는 것들 보관함에 넣고 왔는데 거기에 딸려 들어갔을까? 차에 떨어졌을까? 경옥이 집에서 차에 싣지 않았을까? 어떤 것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는데 어쨌든 찌개거리는 없다. ㅋ
라면을 끓여 먹고 커피도 끓여 먹고 슬슬 하산하기로 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손이 시리고 발이 꽁꽁 얼었는데 비닐하우스를 걷어내니 그 추운 건 추운 것도 아니었다. 하우스 안에서도 추웠는데 바깥에 서서 식사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추울까.
하우스 안에서 대화내용 중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겠다는 얘기도 있었다. 춥고 컨디션도 그렇고 무릎도 안좋고.... 나도 속으로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 하는 생각과 그러면 후회할 것 같은 생각에 갈등을 하다가 곤돌라를 타고 내려가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여기서 사망하는 수가 있겠어. 이러면서... 그러나 어찌된 건지 모두가 한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ㅎ 곤돌라 안타??
상고대라는 단어를 들어는 봤으나 뭘 말하는지 몰랐다. 상고대를 아는 사람도 늘 상고대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태경이도 바로 전 주말에 덕유산에 왔다 갔는데 못봤다고 했다. 일출처럼 운 좋은 사람들만 보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운 좋은 사람일세. 알지도 못하는 상고대를 처음 산행에서 처음 만났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나무에는 눈꽃이 더 활짝 피어나는 것 같았다. 눈보라인지 눈안개인지 계속 몰아친다. 하산하는 곳곳에 바람길이 있는지 유난히 바람이 많은 곳이 있었다. 그런 곳은 앞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 해가 쨍하면 햇살이 따뜻할지는 모르지만 또 다른 풍광을 보여주겠지. 흐린 날의 풍광도 괜찮다. 마치 히말라야를 온 듯한...
사진 찍는 사람들은 사진을 찍어가며 내려오더만 나는 단 한장의 사진도 찍지 못하고 앞으로 앞으로 눈길 행군만 했다. 하산을 처음 시작할 때는 손 발이 모두 얼어서 동상에 걸릴까봐 걱정스러웠는데 걷다보니 몸에 열이 나서인지 손 발이 풀린다. 성호가 건네준 버프가 세찬 바람에서 얼굴은 감싸주나 대신에 눈썹이 상고대가 되길래 안경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내려오는 길은 그닥 힘들지 않았다. 트레킹이라는 게 맞는 것 같다. 조금 가파른 곳이 있었으나 잠깐이었고 아이젠 때문에 미끄럽지 않게 더 빨리 내려올 수 있었다. 다만, 추운거. 추워서 무릎이 뻑뻑하고 하체가 냉냉한 거. 그것만이 어려움이었다.
백련사 주차장에서 짐을 풀고 출출해서 요기를 했다. 남은 과메기와 홍어무침, 얼마 남지 않은 술. 그것은 꿀맛이었다. 다시 출발, 휴게실까지 내려오니 미리 내려온 세 친구가 있다. 거기에서 또 따뜻한 오뎅과 한 잔, 또 새로운 대화..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영균이과 성호가 미리 차를 가지러 가고 우리는 시간 맞춰서 휴게소에서 출발, 걸어내려와 차를 탔다. 그 거리도 30분 정도 되었을듯.
두 차에 다시 나눠타고 출발, 무주에서 유명하다는 짬뽕집에 갔다. 으흐흑.. 여기서 또 생생정보통을 만났다. 이쯤 되니 별로 반갑지도 않아. 짬뽕도 쟁반짜짱도 모두 매운맛. 내 생체를 화나게 하지 않으려고 쟁반짜장 조금과 짬뽕에 올라앉은 홍합을 적당히 먹었다. 그리고는 두 차에 올라 서울로 출발.
중간에 휴게소에서 따뜻한 유자차와 꿀차를 한 병씩 먹어주었다. 피로를 풀고 감기에 걸리지 말라고. 커피보다 좋았다. 그리고 쌩쌩 달려서 서울로. 수락산역 근처에서 내려줘서 거기서 택시를 타고 집에 왔는데 집에 도착시간 9시 15분쯤. 히야... 그 먼거리를 도대체 얼마나 빨리 달려갔다 온거야? 샤워하고 따뜻한 잠자리에 누운 시간은 10시가 좀 넘어서였을거다.
갑자기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완전 겁 잔뜩 먹고 쫄았었다. 나, 여기서 죽는거 아닐까? 살아돌아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ㅠㅠ 이유는 단 하나, 너무 추워서. 상체는 전혀 춥지 않은데 얼굴, 손, 발이 추웠다. 전날 퇴근하며 급히 산 패딩자켓은 배낭속에서 잠만 쿨쿨 자고 입어보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말단만 추웠던 것이지. 그랬는데 시간이 한참 걸리기는 했으나 움직이니까 풀리더라는 거. 산 위에서는 다시는 겨울 산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다 내려와 백련사쯤 오니까 다음에도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집에 와서 든 생각은 다음에는 하산만 할 게 아니라 등산을 하고 난 후에 하산을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소백산 갔다 왔을 때도 힘들기는 했어도 아팠다는 기억은 별로 없는데 월요일 오후인 지금까지도 하체가 아프다. 평소와는 다르게 아픈데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 등산을 하지 않고 하산만 해서 그런 것 같다. 다음에 겨울 큰 산을 간다면 내복을 입거나 스커트를 더 입고 등산도 하고 하산도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친구들 덕분에 편안하게 겨울 큰 산을 잘 다녀왔다. 추웠다는 것이 내게는 제일 큰 어려움이었는데 그건 내가 각오를 제대로 하지 않고 간 탓일게다. 남쪽 산이니까, 글고 내가 산에 한 두 번 가보나? 뭐 이런 생각에 안이했다. 아, 겨울 큰 산은 정말 춥다. 이제 알았으니 다음에 각오를 하고 간다면 더 좋은 등산, 사진도 찍어가면서 등산할 수 있을 것 같다.
히말라야 같았던 그 풍광이, 영화속에서 본 것 같았던 그 설산이 마음속에 그림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