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장애인의 날이라고 한다. 장애인 하면 나랑은 별 관계가 없는 먼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는데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아빠가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일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빠는 교통사고로 서울대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는데 살리기 위한 뇌수술이 아니었고 죽기 전에 가족들의 원이라도 풀어주자는 의미의 뇌수술이었다고 한다. 의사들은 누구도 아빠가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한달이 가깝도록 혼수상태로 있다가 깨어났다. 말도 못하고 스스로 걷지도 서지도 심지어 앉지도 못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앉기도 하고 말도 조금씩 다시 시작하고...불편한 걸음걸이로라도 아빠가 스스로 걷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기억한다. 그 당시 나는 철없는 아이라 아빠의 상황에 별 관심도 없었고 사고로 인해 우리집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할 줄 몰랐다. 다만 사고 후의 아빠, 뇌수술 때문에 빡빡 민 머리가 조금 자라나 스포츠 머리를 한 아빠는 낯설고 두려운 타인같은 존재로 느껴졌고 그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주변사람들에게 인텔리라, 좋은 사람이라 칭함받던 아빠는 서른아홉 젊은 나이에 장애인이 된 것이 견디기 힘드셨으리라. 아빠만 힘든 게 아니라 가장의 짐을 건네받아 져야 했던 엄마도 힘들었을 것이고 본인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짜증스러워하는 아빠의 짜증을 보고 자라는 우리 삼남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집에는 풍금이라, 오르간이라 부르는 악기가 있었다. 아빠는 첫 딸인 나를 낳자마자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 그당시 집값보다 비싸다는 풍금을 장만하셨다고 한다. 아빠는 풍금을 잘 치셨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내가 대여섯살 때 아빠는 직접 내게 풍금을 가르쳤다. 틀릴 때마다 손등을 때리는 30센치미터 대나무 자가 어찌나 아프던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그 고통. 아빠는 의욕이 너무 앞서는 바람에 딸을 피아니스트로 키워내지 못했다. 가끔씩 아빠는 퇴근하고 돌아와 풍금을 치면서 우리 삼남매를 옆에 세우고 동요를 가르치셨고 다니는 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늘 아빠가 반주를 하셨다. 교통사고 후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일어선 어느날 아빠는 풍금에 앉았다. 그러나 전처럼 자연스러운 음악이 연주되지 않았고 박자도 안맞고 삑삑 빽빽 여기저기서 불협화음이 나왔다. 아빠는 그때 좌절하셨고 짜증을 냈다. 그 후로 다시는 풍금 앞에 앉지 않으셨다.
엄마가 가장이 되다보니 경제적인 형편도 나빠지고 그 덕에 우리 삼남매는 누가 뭐라지 않아도 기죽어 자라게 되었다. 밑으로 두 남동생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밖에 나가면 기가 죽고 집에 있으면 짜증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크게 부모님 속을 썩이지는 않았어도 늘 부모님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불편했는데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이유도 그런 영향이 컸다.
지금은 지원액이 충분하든 충분치 못하든 간에 뺑소니 교통사고를 정부에서 지원해 주기도 하고 여건이 좋아지고 의식도 변해서 개인적으로 보험을 드는 경우도 많지만 그때는 아무런 지원도 없었고 병원비조차 환자가 모두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무슨 사고라도 당해 장애인이 되고 나면 본인 뿐 아니라 가정과 심지어 집안이 파탄나는 지경에 이르기 십상이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좀 나아지기는 했겠지만 아직도 장애인이 있는 가정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여러가지 상황들이 다 그럴 것이고 특히 경제적인 문제라면 더더욱. 고통속에 있는 장애인 가정마다 단 한가지라도 희망이나 빛이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상황이든, 경제적 여유든, 최소한 마음의 평화라도...
오늘 아침, 뉴스에서부터 장애인의 날이라는 소식을 들으면서 관계없는얘기로 밀어내 놓았다가 오히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었음을 깨닫고 새삼스레 오래 전 일들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