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알까, 오늘이 자기 엄마의 기일이라는 것을.
오늘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만 10년이 되는 날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일 새벽.
2000년 1월 2일은 주일이었다.
그날 새벽 4시에서 8시 사이에 어머니는우리집에서 혼자 돌아가셨다.
청개구리도 마지막 엄마의 소원은 들어주었다 하고
살면서 보면 살아생전 불효자들도 돌아가신 후에는 장례식도 후하게, 제사도 열심히 지내더라만
우리는 뼈대있는 집안 사람들, 아니 보통 사람들에게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불효자 중 불효자다.
어머니의 큰 아들은 오늘 밤에 정성껏 제사를 모시겠지만우리는 해마다 이 날을 그냥 지나쳐버린다.
돌아가시고 처음 몇 해는 어머니를 마지막 보낸 그곳에 우리 세 식구가 찾아가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서 한 겨울 땡땡 어는 추위에 하던 그 짓은 그만두었다.
어머니는 내게 다정한 분이 아니셨다.당신 아들에게도 따뜻한 분은 아니셨다고 한다.
그것은 어렵게 살아온 그 시절의 어머니들의 보편적인 모습일 것이다.
시어머니 모시고 살기 힘들지 않느냐거나고생한다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늘 어머니를 모시고 살지 않고 함께 산다고 말했었는데
그 이유는 다른 이들처럼 어머니를 편안하게잘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 후에도 일을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와 나는 적당히 서로 도우면서 함께 살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남들 다 겪고 사는 고부갈등도겪었는데나중에야그것이 고부갈등이 아니라 세대갈등이었음을 깨달았다.
남편은 어머니가 낳은 여덟 자식 중에 일곱째였고 나는 우리 엄마가 낳은 첫자식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어머니는 내게 어머니보다는 할머니에 가까운 연세였다.
그래서 우리의 갈등은 고부간의 갈등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세대갈등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대부분 시어머니가 그러듯이 때때로 다른 형제들에게 내 험담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어느날 내가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것을 모르고 시누이와 전화로 내 험담을 하다가 제대로 걸렸는데
그때 나는 화를 벅벅 내면서 그렇게 내가 맘에 안들면마음에 드는 자식한테 가서 사시라고 했었다.
현장에서 딱 걸려서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어머니의 무안한 표정을 나는 지금까지 기억한다.
노인을 우리에게 밀어놓고 자식노릇 전혀 하지 않는 형제 자매들도 모두 미웠다.
10년 전만 해도 나는 일이 바빴고 일중독에 빠져 살았던 때였다.
1999년 12월 마지막 주간에 어머니는 감기에 걸렸는데 병원을 초등 4학년이던 어린 별이와 같이 다녔었다.
12월 30일, 감기가 심해져서 다음날은별이와 병원에 가기에는 좀 무리일 것 같아서남편이 시누이들에게 전화를 했다.
한 번만 와서 어머니 모시고 병원에 좀 다녀 오라고.
우리는 그때 일이 너무 바빠서 시간을 뺄 겨를이 전혀 없었고그 전에도 후에도 시누이들에게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랬는데 시누이들이 서로 미루면서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1월 2일 새벽에 집에서 돌아가셨다.
나는 그 밤, 그 새벽에 어머니의 기침소리를 간간이 들었고 새벽 4시에 남편이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피곤에 절어서 일어나지는 못하고 비몽사몽간에 꿈을 꾸었는데
어머니가 내게 별이 아빠 양복을 사주지 않았다고 나무라는 꿈이었다.
그리고 그 아침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나중에야 꿈에서 말씀하신 양복이 상복이었구나, 내게 미리 얘기해 주신거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어머니는 화장실에 다녀와서 거실에서 자는 듯이 돌아가셨고우리는놀라서 119를 불렀다.
한일병원 영안실에 어머니를 모시고 알려야 할 곳에 연락을 했다.
이틀 전에는 서로 미루고 오지 않더니 연락을 하니곧 시누이들이 달려 왔다.
어머니를 어떻게 모셨기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느냐고,
굶긴 것은 아니냐고, 얼려죽인 것은 아니냐고 내게 소리소리 질렀다. 하하..
아아, 별이 아빠 빼고는 모두 효자 효녀였고사위도큰며느리도 모두 어머니를 지극히 생각하는 효심깊은 사람들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 밤에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분하고 억울해서 울었다.
성질이 더럽게 못된 나는 내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내 살을 물어 뜯으면서 울었다. 그랬었다.
그리고 별이아빠에게 장례만 마치면 이혼하자고 했다. 다 꼴보기 싫다고..
다음날 아침 나는 일 때문에 오전에 출근을 했다가 병원으로 퇴근을 했고
장례 방식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지만함께 살던우리 방식대로 장례를 치렀다.
나는 그때 꼭 이혼을 하고 싶었는데 우리는 이혼하지 않았고
별이 아빠는 제 형제들과의 인연을 끊어버렸다.
그 당시는해결되지 않는 분노 때문에 힘들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기억이 퇴색되어 갔다.
그리고 작년,조카의 결혼식이 있다고 연락을 받았고 두 세 번 얼굴 보기는 했어도
만나고 싶지 않으면 안만나면 그만이니 별 스트레스는 없다.
그냥 이래저래 요즘은 세월이 약이구나 하는 생각 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형제들에 대해서는 분노했어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아팠다.
80세에 돌아가셨는데 5, 6년 정도 더 사셨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친정 할머니, 외할머니가 연세 훨씬 높은데도 그 당시 살아계셨기 때문에 80세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해드리지 못했던 것들이 마음에 많이 걸렸고
가난하게, 자식들에게 존중받지 못하면서 살았던 세월들이 마음아팠다.
어머니는 말수가 많지 않은 분이셨는데
그 시절의 어른들이 그렇듯이 배우지도 못했고 가진 것도 없었지만 예의바르고 참한 분이셨다.
별이가 아플 때 별이를 안고 기도하던 모습과
성경을 불경 읽듯이 읽으시던 모습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해마다 오늘이 되면 어머니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서 안타까움조차도 퇴색해가는 듯하다.
남편은 알까, 오늘이 자기 엄마의 기일이라는 것을.
' 주절주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질러대기! (0) | 2010.01.04 |
---|---|
저녁식사 (0) | 2010.01.01 |
첫 예배 (0) | 2010.01.01 |
2009년, 되돌아보니 (2) | 2009.12.29 |
091224 - 운도 좋아~ ^^ (4) | 2009.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