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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

좋은 아빠

 

1994년, 지난 여름의 지루한 폭염조차도 그 기록을 깨지 못했던 1994년에 별이는 다섯살이었고 그 해에 연희가 한국에서 한 해를 보냈었다. 연희와 나는 다섯살 짜리 별이와 똑같이 다섯살인 연희 딸 민경이를 데리고 일산 정순이네 하룻밤 놀러갔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던 나는 내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하지 못하고 사무실 가까운 *얄호텔에서 셋이 만나 하룻밤 보내자고 예약을 하려 했는데 정순이 남편이 그 호텔이 위험하다고 자기 집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해서 먼먼 일산까지 갔던 것이다. 다섯살 짜리 꼬마 둘과 그보다 어린 정순이 딸까지 세 아이를 정순이 남편이 돌봐주고 놀아주고 우리 셋은 편안하게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고 밤을 보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에 별이가 물은 적이 있었다. "좋은 아빠네 집에 또 안가?"

 

별이아빠도 누가봐도 좋은 아빠일텐데 부드럽게 얘기하고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책 읽어주고 같이 놀아주던 정순이 남편이 별이 눈에는 좋은 아빠로 비친 모양이다. 물론 그때는 다섯살 때여서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 가끔 그때 얘기를 하면 별이는 그 집에 갔던 기억조차 하지 못하지만.

 

오늘 그 좋은 아빠를 만났다. 지난 주말에 한국에 들어와서 몇 번 통화를 했는데 오늘에서야 우리 사무실에 찾아왔다. 영주권 서류에 필요하다고 해서 KBS 재직시에 그가 기안했던 서류들, 포트폴리오를 내가 받아서 스캔을 해서 메일로 보냈었는데 그 서류들, 원본을 한국에 나온 길에 찾으러 온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는데 오늘 만나고 보니 서류가 중요한 건 아니고 (퀵이나 택배로 받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꼭 나를 만나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내가 도와준 건 정말 별 거 아닌데 그걸 대단하게 생각하고 고맙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서류를 준비할 때부터 전화로도..) 불편하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이제 미국에 들어간 지 6년이 되었는데 SAT 학원은 운영이 잘 되어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영주권도 나왔다고 한다. 집도 마음을 정하지 못해서 여태 사지 않았는데 이제는 지금 있는 곳에 뿌리를 내릴 생각으로 땅을 구입해서 짓기 시작했다고 하고. 아이들도 작 적응하고 영어도 잘 하고 정순이는 미국 세무사시험에 합격해서 개업을 해도 된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 정순이가 한국에 있을 때는 집안 꾸미기에 재미를 붙이더니 이제는 직접 집을 지어보고 싶다고 집짓기를 시작했댄다.

 

로얄밀크티를 주문해서 마셨는데 맛있다면서, 처음 먹어본다면서 이름을 묻는다. 한 시간 가량 얘기하다가 저녁을 먹자고 하는데 아무래도 편치 않아서 배도 고프지 않고 운동도 가야 한다며 사양했다. 별이 선물로 문화상품권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못했다면서 봉투를 내민다.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주는 사람이 무안할 것 같아서 그냥 받았다. 받으면서 별이가 옛날에 얘기했던 "좋은 아빠" 이야기를 해주고 "좋은 아빠"가 주셨다고 전해주겠노라고 했다.

 

한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고 다섯시, 택시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온다. 모처럼 한국에 들어온 아들, 빨리 보고 싶은 어머니 마음일텐데 전화받는 태도가 너무나 공손하고 다정하다. '좋은 아빠'는 '좋은 아들'이기도 했다.

 

나중에 정순이가 짓는 정순이 집에 한 번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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