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언니 생각 좀 해야 돼. 일년에 하루쯤은 언니랑 한 잔 하는거야.
우리가 같이 직장생활 했던 기간이 얼마나 되지? 일년쯤? 아니면 그보다 긴가? 짧은가? 뭐든 다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이제는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 자꾸 퇴색을 해.
주머니 탈탈 털어서 생맥주에 치즈 몇조각 나오는 안주 시켜먹던 그 가난했던 시절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치? 그 직장에서 그만둘 때는 참 억울했었지. 지금 같으면 좋은 직장이라고 낙지처럼 붙어 있었을텐데 어려서 였을까? 더럽고 치사한 꼴 못보고 사표를 내던진건? 근데 언니는 왜 덩달아 사표를 냈어? 언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었는데. 그게 언니의 정의감이었어? 아니면 의리? 의리 지킬 정도로 나랑 깊은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때의 인연이 잠깐인데 비해 그 후의 인연이 거의 30여년 가까이 되었지. 우리 자주 만난 적도 있지만 멀어서 못만난 세월이 더 길었고 오랜만에 가끔씩 만나면서도 속으로 언니를 맘에 안들어 한 적도 많았었는데. 그런데 언니는 왜 그렇게 연애하는 사람같이 내게 잘해줬을까?
고마워. 특히 고마운 건 나를 기다려줬다는 거. 오랜만에, 입원해 있는 언니와 통화했던 날, 통화할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나중에 나으면 보자더니 꼭 보고싶다는 내 말에 언니가 오라고 했었지. 일년남짓만에 봤던가? 내가 갔을 때 언니는 상상 이상이었어. 머리는 새로 나기 시작해서 스포츠 머리, 모습은 살이 모두 빠져서 피골이 상접한, 마치 80대 할아버지 같았어. 나는 속으로 너무 놀랐고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잘 참고 내색하지 않았어. 그렇게 놀라운데 내색하지 않았던 내가 참 신기할 정도였어.
내가 알아듣지 못했던 언니의 마지막 말은 "죽었으면 좋겠어" 였어. 언니의 가족들도 모두 언니가 이제는 그만 고통에서 놓여났으면 좋겠다고 했어. 그날, 내가 보고 온 그날 밤이 지나고 신새벽에 언니는 고통없는 곳으로 떠났지. 마지막 만남을 갖지 못했다면 나는 얼마나 한이 되었을까. 언니는 끝까지 내게 선의를 베풀었어.
여기 혜화동 비어할레. 언니 투병중일 때 이 동네에 와서 연극을 본 적 있었지. 연극제라 여러 편의 연극이 오르는 무대였는데 언니가 힘들까봐 우리는 그중 몇 편만 보고 나왔었지. 그리고 민들레영토에 가서 식사를 했었어. 비어할레, 언니가 같이 오면 딱 좋아할 분위기야. 30여년 전 그때, 둘이 있는 돈 없는 돈 털어 생맥주 아껴마시던 때가 생각나. 이 소시지, 독일김치, 부추김치, 달콤한 크림 올린 감자, 언니가 모두 좋아할텐데. 언니도 같이 먹자. 히히..
일년에 한번쯤은 언니 생각 해줄께. 언니랑 한잔하는 자리를 마련할께.
맛있다. 옛날의 그 맥주처럼. 에이, 근데 부추김치는 맛없다. 맛없어야 정상인 독일김치가 더 맛있네. 언니가 살았더라면 나이 조금 더 들어서 언니랑 독일이며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에 가보는건데. 언니 눈으로 보고 언니 입에서 나오는 감탄사를 들으면 나 혼자 보는 것보다 훨씬 감동적일텐데. 난 참 귀한 걸 일찍 잃었구나.
언니, 여기 음악이 별로 크지 않은데 내자리 바로 위에 스피커가 있나봐. 소리도 크지 않아 좋은데 나오는 음악도 좋으네.
언니, 한동안 내 꿈에 자주 오더니 요즘은 안보여. 꿈에서도 언니는 나 만나러 오려고 예쁜 옷 입었다고 했어. 히히.. 언니는 그랬었지.
첫잔은 크롬바커 바이젠을 시키고 둘째잔은 그냥 생맥주를 시켰더니 아, 정말 맛없네. 크롬바커 필스 시킬걸. 이제 대충 다 먹고 일어나려 해. 오늘이 언니 기일이라고 혼자 한잔하며 언니 생각하겠다고 맘 먹었을 때, 언니 섭섭하겠지만 깊은 슬픔에 빠지진 않았어. 그런데 문득문득 눈물이 나려 하더라. 참았지. 언니가 있었더라면 참 좋을텐데. 같이 늙어가며 같이 할게 많을텐데. 여행도, 수다도, 등산도...
언니, 잘 지내고 내년에 또 만나. 가끔씩 언니 생각이 나겠지만 오늘처럼 온전히 언니 생각하기로 작심하는 날은 일년에 한 번 뿐일거야. 안녕...
이천십사년 사월 팔일
저녁에서 밤으로 가는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