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간은 쉴 수 있겠지 기대했었다. 한 주간을 쉰다면 내 충무로 생활 30년 중에 가장 긴 휴가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월요일, 봉하에 다녀온 이후 화, 수, 목 계속 충무로 정리할 일이 끝나지 않아 잠깐, 혹은 길게 나가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엄마와 나 병원 진료도 받고 해람과 점심도 한번 먹고 짤라팀 점심벙개, 이장네 홍대벙개, 사인중 삼색벙개... 숨가쁘게 보냈다. 꼭 만나야 할 은.미.를 계속 미뤄둔채.
6월에 학기가 끝나면 미국으로 돌아갈텐데. 안만나도 괜찮지만 멀리 왔으니 한 번 만나는게 좋을텐데 생각만 하고 있다가 마지막 쉬는 주간에 연락하려 했는데...
목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내게 단 하루 남은 금요일에 시간이 어떤지 메일을 보냈다. 학기말이라 정신없이 바쁘고 미국은 8월에야 돌아갈테니 1, 2주 후에 만나자고 답장이 왔다. 그럼 그렇게 하자고 하고 내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합격을 하고 취직을 해서 월요일부터 출근한다고.. 그랬더니 다시 메일이 왔다. 새출발을 축하해줘야 하고 기도도 해주고 싶은데 금요일 6시나 되어야 수업이 끝난다고. 토요일 일산으로 올 수 있겠냐고 묻는 메일. 토요일은 또 다른 약속이 있으니 내 입장에서는 금요일 저녁이 나았다. 검색해보니 전철만 2시간. 그래도 내가 움직이는게, 멋지구리한 교수친구의 학교와 연구실도 구경하고.. 그게 좋겠다 싶어 금요일 저녁 6시에 맞춰 가겠다고 메일을 보냈다.
4호선, 공항철도, 인천1호선을 타고 캠퍼스타운에 내려 버스를 탔다. 택시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 동네는 택시도 없고... 내리고 보니 걸어와도 될만큼 멀지 않은 거리인데 버스가 뱅뱅 돌아 시간만 잡아먹었다. 600여미터 걸어 은.미.의 학교를 찾았다. 학교를 찾고 입구를 찾고 연구실 4050호를 찾기까지 한참이나 걸렸다. 드디어 출입문을 확인해놓고 캠퍼스 사진을 몇 장 찍는데 건물 위쪽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올려다 보니 4층 몇 개 열린 창문으로 내다보며 나를 부른다. 하하.. 목소리 여전하구나. 중학교 때 그 목소리, 그 이후에 만날 때 그 목소리, 지금 들리는 그 목소리가 다 똑같다. 내 목소리는 늙어 달라진 거 같은데.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 연구실에 들어가보고 같이 나와 캠퍼스 안에 있는 교수아파트에 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집에 있던 은.미.남편과 같이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차를 달려 대부도로... 석양을 보여주고 싶다 했는데 미세먼지로 하늘과 바다가 구별이 되지 않고 해는 흔적도 없다. 시화대교를 건너 구봉도 가기 전 바다를 면한 횟집 2층의 복층, 마치 다락과 같은 방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저녁을 먹었다. 키큰 은.미.남편보다 더 높은 다락이라 하기엔 미안한 복층이 은.미.는 아주 마음에 드는지 연신 좋다고... 싱싱한 회와 해물, 조개찜, 칼국수까지 나오는 코스를 시키고 은.미.는 "내가 기도를 잘 하지는 못하는데 네 새출발을 위해 기도하고 싶다"고 하며 셋이 손을 잡고 기도하자고 했다. 길지 않은 은.미.의 기도에 나는 감격, 감동했다. 이런 날이, 살다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철저한 무신론자인 은.미.를 위해 기도했었다.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내 기도가 이루어질 거라고는 믿지 못했다. 너무나 완강한 친구였으니까. 너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조차도 할 수 없었던.. 몰래 했던 간절한 기도, 확신을 갖지 못하면서 했던 그 기도가 이루어지고 내 앞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먹고 내려와 바닷가로 걸어갔다. 깜깜해진 바다. 멀리 불빛 많은 곳이 구봉도라 했다. 시원한 바닷바람 맞으며 이런 저런 얘기하는데 멀리 구봉도 쪽에서 뭔가 불빛이 날아오른다. 뭘까. 잘은 모르지만 풍등이 아닐까 싶었다. 은.미.가 나를 위해 하느님이 보내준거라고, 내 새출발을 격려하기 위해 이벤트를 준비하신 거란다. 하하..
자기 집에 가서 자고 아침에 가라는 걸 뿌리치고 오이도역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곧 방학을 하면 일산 엄마집에 있을 거고 그때 상게동 우리집에 오겠다고 했다. 같이 내가 늘 걷는 불암산둘레길을 가자고..
은.미.와 함께 나눈 이야기들을 기억한다. 나는 은.미.에게 많은 도전을 받았는데 은.미.는 새인생 시작하는 나로 인해 도전을 받는다고 했다. 서로 도전을 주고받는, 우리는 참 좋은 친구라고.
나는 다른 친구는 몰라도 은.미.는 만나지 않아도 충분하다. 은.미. 또한 그런 것 같다. 정신적 교감만으로 충분한 우정. 나랑 다른 면도 많지만 같은 면이 많아서 또다른 나를 보는 것 같은 은.미.와의 이 우정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