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숙언니가 두 달간 투병생활을 같이 하면서 사귄 친구가 연극 무대에 섰다며 같이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해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따라가보니 2011 신춘단막전이라 한다. 오후 3시부터 밤 9시 30분까지 1부에 4편, 2부에 4편 총 8편의 연극을 볼 수 있는 자주 만나기 어려운 기회였으나 언니의 건강이 허락하는 만큼만 보고 나왔다.
1부의 첫 공연인 확률과 두번째 공연인 자유로울 수는 없나요, 그리고 그 친구분이 출연했다는 크리스마스에 삼십만원을 만날 확률 세 공연을 보았다.
1.
한국일보에서 상을 받았다는 "확률"은 두 명의 배우가 나와 연기를 하는데 교통사고 현장이 보이는 벤취에 앉아서 사고를 당한 이들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일까를 추측해가는 내용이다. 낮에, 월요일에, 모텔이 많은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가 교통사고가 났다는 사실과 차종이 BMW라는 것만 가지고 그들은 그들나름의 추측을 이어간다.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추측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 두 사람의 머리 위에 천사처럼 하얀 동그란 깃털이 올려져 있음으로 인해 교통사고를 당한 이들이나 그것을 보고 멋대로 추리하고 추측하며 그들을 정죄한 이들이나 다를바 없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2.
전남일보 당선작 "자유로울 수는 없나요?"는 창살도 없는 감옥 안, 교도관과 수인들의 이야기인데 좀 난해했다. 아마도 삶의 모습을 빗대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우리의 삶도 창살없는 감옥, 탈출하려면 탈출할 수 있는데도 탈출하지 못하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을까. 또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는 상황에서 누구든지 입장에 따라, 위치에 따라 가해자가 될 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을까. 아마 그런 것 같았다.
3.
우리가 본 마지막 작품은 부산일보 당선작 "크리스마스에 삼십만원을 만날 확률"은 떨어져 있는 가족 엄마, 아버지, 아들의 이야기이다. 언니의 친구분이 연기한 엄마는 분식집종업원으로 하루종일 김밥을 써는게 일이었고 육십인 그녀에게는 10살이나 어린건달 애인이 있다. 아버지는 동네 파리날리는 부동산을 운영하면서 다방 아줌마와 사귀고 있으며 나이 삼십 먹은 아들은 소설을 쓴다면서 세월을 보내는 위인.
크리스마스 이브에 엄마의 애인은 무전취주(無錢取酒)하여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술값 삼십만원을 가져오라 하고 아들은 애정이 식어버린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를 위해 삼십만원이 필요하며 아버지는 밤에 부동산으로 놀러 올 다방 아줌마와 따뜻하게 지내고 싶은데 도시가스가 끊겨 있어서 밀린 요금을 해결하기 위해 삼십만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돈은 엄마 통장에 삼십만원이 전부이다.
아들은 엄마한테 돈을 빌릴 생각, 아버지는 아들한테 돈을 빌릴 생각, 엄마는 아버지한테 돈을 빌릴 생각.. 계산은 맞지만 실제 돈이 없으니 말만 빙빙 돈다. 결국은 모든 상황이 밝혀지고 모두 크리스마스 계획을 취소한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의 부동산에 가서 청소를 하고 엄마는 아들의 고시원 방에 가서 청소를 하고 아버지는 엄마의 분식집으로 찾아든다.
스토리는 재밌었다. 앞에 두 편이 좀 무겁고 난해해서 지루했다가 세번째 공연이 재밌으니 객석에서 웃음이 자꾸만 터져나온다. 그런데 나는 이 웃기는 연극을 보며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연극에서 실물경제에 기반하지 않은 허구를 본 것 같다. 작가는 혹시 자본주의의 허점이나 금융위기를 조소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어쨌든 내게는 재미있기도 했지만 생각할 꺼리를 안겨준 연극이었다고 할까.
4.
뒤로 남은 공연도 보면 좋았겠지만 세 편을 보는데 꼬박 두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아픈 언니가 병날까 두려워 서둘러서 자리를 떴다. 특이한 건 특별한 공연이어서 그랬는지 다른 공연을 볼 때와는 다르게 관객이 많았다. 좌석이 없이 통로에 앉아서 보는 관객들도 많았고.. 우리 둘이 빠져나온 자리에 누군가가 편하게 앉아 공연을 볼 수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