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금요일.
주말에는 단풍이 절정일거 같아서 이 기회를 놓치면 후회하겠다 싶은 생각에 어디를 갈까 하루종일 고민하다가 중앙선 전철을 타고 운길산이나 용문산에 가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그날밤, 내일 뭐 할거냐고 별이아빠가 묻는다. 생각했던 대로 단풍구경하러 운길산이나 용문산에 갈 거라고 했더니 본인도 오전에는 K의 일을 도와주기로 했고 오후에는 4시에 세미나가 있어서 늦는다고 한다. 각자 알아서 하루 보내면 되겠구나 생각하는데 별이아빠가 묻는다.
"그런데 소는 누가 키우지?" -.-
2.
갈 길이 멀긴 해도 주말이니 한시간쯤 늦잠을 자고 7시에 일어나서 등산갈 채비를 한다. 베낭에 넣은 건 달랑 사과 한 알. 8시 20분쯤 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창동으로, 창동에서 회기로, 회기에서 용문가는 전철을 탄다. 용문가는 전철은 등산객으로 만원이다. 그냥 서서 가기에는 창밖 경치를 구경한다 해도 힘들다. 뭔가에 몰입을 해야 덜 힘든법. 그럴 줄 알고 베낭에 넣어 온 책을 꺼내 읽는다. 법정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 어쩌다 보니 혼자 가는 등산과 딱 어울릴만한 책을 용문까지 가는 도중 가끔씩 창밖을 내다보면서 다 읽었다.
용문에서 내리면 버스를 타야 한다는 정보 쯤은 있었지만 얼마나 걸리는지, 산은 얼마나 높은지도 모르고 출발한 여정이었다.
사람들 우르르 가는 쪽을 따라 가면 되겠지. 걸어서 버스터미널에 도착, 버스를 타고 20여 분 걸려서 용문산 입구에 도착했다. 물과 주스 각 1병, 비상식으로 연양갱 두 개를 사고 점심은 떡을 사려고 했는데 파는 곳이 없어 못사고 주변에 있는 식당에서 나는 시골 잔치집 냄새만 잔뜩 맡았다.이미 내 배는 고프기 시작하는데. -.-
조금 올라가니 입장권을 파는 곳이 나온다. 2천원. 표를 사고 올라가는 초입은 등산객보다 단풍구경 나온 나들이객이 훨씬 많다. 가족단위 소풍객이 많아 노인과 어린 아이들도 많고 간혹 관광버스를 타고 단풍구경을 온 단체팀도 많다. 가슴속을 시원하게 하는 좋은 공기를 마시며 나무 향기, 낙엽 향기 나는 길을 걷자니 참 잘왔다는 생각이 든다.
3.
용문사 은행나무를 지나 등산로를 따라 오르기 시작하다가 떡파는 곳을 만나 떡을 한 팩 샀다. 여기 없었으면 굶을 뻔... 지도를 보니 정상까지는 3키로가 조금 넘고 마당바위가 그 중간쯤에 있다. 마당바위까지만 갔다가 올까? 아니면 정상까지 가볼까? 생각을 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다.
긴팔 등산티셔츠에 얇은 바람막이 점퍼만 입었지만 올라가니 땀이 난다. 그래도 점퍼를 벗기에는 추울 것 같아서 그냥 입고 한걸음 한걸음 오르는데 돌이 많아 쉽지 않다. 게다가 전날 새로 맞춰 쓴 안경이 눈에 익숙하지 않아서 - 돗수가 쓰던 것보다 많이 높아졌다 - 불편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길이 어떤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도 모른채 혼자 오르는 초행길은 두렵기도 했다.
올라가면서 내내 생각한다. 어디까지 갈까. 중간쯤에 마당바위가 있다고 했는데 거기까지만 갈까. 벌써 한참 온 것 같은데, 마당바위가 나올 때가 지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안보일까. 땀은 흐르고 머릿속은 계속 마당바위까지 갈까 더갈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그만 내려갈까 복잡한데 아무런 생각도 없는 발은 그냥 터벅 터벅 바위로 뒤엉킨 길을 걷는다.
4.
마당바위가 보인다. 사람들은 마당바위 주변에서 싸온 점심을 펼쳐놓고 먹고 웃고 떠들고 쉬지만 혼자인 나는 그 틈에 앉기 멋적어 조금 더 올라간다. 다들 점심먹고 쉬는 듯 올라오는 사람이 적다. 배가 고프니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사과라도 먹어야지.
사과를 먹으며 생각한다. 그래, 이렇게 한발 한발 참고 오르다보면 정상까지 가는 거지 뭐. 중간에 내려갔더라면 여기까지도 못와보는 거잖아? 힘들어도 조금만 더, 또 조금만 더.. 그러다보면 성공하는거 아냐? 인생이 그런거 아냐? 어렵다고 생각해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천천히 참고 조금씩 터벅터벅 오르다보면 언젠가는 올라갈 수 있는 거 아냐? 등산하면서 개똥철학도 해본다. 그리고 내려가지 않고 조금 더, 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 보리라 맘 먹는다.
5.
사과 한 알을 다 먹고 다시 정상을 향해 오른다. 마당바위까지 오르면서도 내려갈까 말까를 망설였는데 여기부터는 오르기가 점점 더 힘이 든다. 힘드는 것은 둘째치고 위험해 보이는 게 더 문제다. 마당바위를 지나니 그곳까지만 오르는 사람이 많은 듯 정상쪽으로 오르는 사람들이 확 줄어들었다. 혼자서 올라가다가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지면 어쩌나... 이제는 차원이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 안되는데. 사무실 서랍 정리를 하지 않아서 아직은 갑자기 죽으면 안되는데... 산을 내려가고 출근을 하면 빨리 책상 서랍 정리를 해야지. 언제 죽어도 간결하게.. 생각하면서 오른다. 땀나고 덥지만 바람막이 점퍼 안은 이미 땀으로 푹 젖어 있어 벗을 수도 없어 그냥 오르는데 햇볕이 쬐는 쪽으로 올라갈 때는 덥고 그늘이 있는 쪽으로 올라갈 때는 춥고, 슬슬 감기에 걸릴까 걱정이 든다.
길치라 등산을 가도 아는 길만 가는데 용문산은 처음이지만 길이 한 길밖에 없고 계속 손으로 잡을 노끈을 쳐놓아서 길 잃지는 않겠다. 아, 이쯤에서 그냥 내려갈까? 아냐,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더 가보자. 정 안되겠으면 그때 내려가면 되지 뭐. 그러다 보니 용문산 능선길까지 올랐는데 대충 4분의 3 지점쯤 될 것 같았다. 능선이라 바위는 적고 주변에 평평한 곳이 있어서 쉴 만 했다. 일단 잠시 쉬고 물도 먹고.. 이제 어쩔까.
6.
능선 평평한 곳을 뱅뱅 배회하다가 조금 더 올라가기로 결정! 조금 올라가니 자신없는 바위 무더기가 나온다. 돌아설까 고민하는데 몇몇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 올라간다. 나도 따라 올라가봤다. 올라가진다. 이렇게 몇 번을 몇 고비에서 망설이다 올라가니 이제부터는 험한 곳에 나무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나무계단은 바위에 비해 올라가는게 낫다. 힘은 들어도 겁은 안나니까. 나무계단으로 한참 올라갔다가는 다시 능선따라 아래로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고 하기를 여러 번. 드디어 정상이 보인다.
정상 표지석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서 사진도 한 장 찍고 사방을 둘러본다. 이만큼 높은 산은 처음 올랐는데 역시 보이는 것이 다르다. 이런 광경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다. 눈 아래에서 저 멀리까지 산이 첩첩 이어진다. 하늘과 구름과 산의 경계가 없고 온통 산으로 가득한 땅에는 군데군데 마을이 보인다.
바로 아래 계단참에서 사가지고 간 떡을 꺼내 먹는다. 춥고 다리 아프고 허리 아프고. 배는 고픈데도 떡은 맛이 없다. 다섯개중 세 개하고 반쪽을 더 먹은 후 다시 베낭에 넣고 내려올 준비를 한다. 늘 느끼는 건데 산에는 올라가는 것도 힘들지만 내려오는 것은 더 힘들다. 무릎에 충격도 충격이고 미끄러지기도 쉽고...
7.
스틱을 빼서 짚고 내려오는데 길도 설은데다가 돌산이다보니 그것도 위험하다. 돌틈에 스틱이 끼어서 넘어질 뻔하기를 몇 번 한 후에 스틱 하나를 다시 접어 베낭에 매달고 스틱 하나로 천천히 내려온다. 계단을 내려오는 것도 올라가는 것보다 힘들고 어디든 올라갈 때보다 내려오는 게 훨씬 겁나고 힘들다. 그래도 올라갈 때는 올라갈까 말까를 망설이며 갔지만 내려올 때 내려올까 말까 망설이지는 않는다. 전혀~ ^^ 힘들어도, 무릎이 아파도, 허리가 아파도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려오는 수밖에.
올라가는 데 걸린 시간이 3시간 남짓인데 2시반 넘어서 정상에서 내려오기 시작했으니까 자칫 잘못하면 해가 저물게 생겼다. 내려오면서 드는 생각은 올라갈 때 드는 생각과는 또 다르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적당히 단풍을 보고 즐기면 되는거지, 내 몸에 맞게 올라가고 무리하지 말고 내려와야지 꼭 산꼭대기를 밟고 와야 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성공했다고, 산 정상을 밟았다고 말하려고? 그것도 욕심이고 일종의 성공신화 아냐? 뭐든지 꼭 끝을 봐야 하는거야?
등산할 때마다 잘 쉬지 않는 편인데다가 시간 여유도 없어서 쉬지 않고 내려왔다. 다리가 아파서 천천히 내려오긴 했지만. 마당바위를 지나 등산로 입구 가까이 내려오니 날이 금방 저물어 간다.
8.
등산로 입구에 도착을 했고 그제서야 안도한다. 지나간 시간은 까마득하게 느껴지고.. 올라갈 때는 사람이 많아서 찍지 못했던 은행나무를 내려오면서 몇 장 찍었는데 아직 노랗게 물들지는 않았다. 10월에 들어서면서 일교차가 심해서 단풍이 고울 거라고 언론에서 떠들더만 갑자기 추워져서 그런지 단풍이 전혀 곱지 않다. 마당바위를 지나면서 그 위쪽은 나뭇잎이 모두 말라 있고 좀 더 높은 곳은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있었다. 색도 곱지 않은 채로. 중간 아래 쯤에는 단풍이 들기는 했지만 역시 곱지 않았고 아래쪽 은행나무는 아직 파란 색이 더 많았다.
이제 해도 지고 날씨도 쌀쌀해지니 땀으로 범벅이 된 몸에 한기가 든다. 추우니 어디 들러서 뭘 먹을 생각도 안들고 내려와서 바로 버스를 타고 나와 전철역으로 갔다. 전철역 안에 있는 편의점에서 뜨거운 커피 한 병을 사서 손을 녹이고 볼도 비비고. 전철을 타고 겨우 자리 하나 차지하고 앉아서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가는 길은 책도 읽고 바깥 풍경도 봤지만 오는 길은 반은 졸고 반은 자고...
9.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기장판을 따뜻하게 켜놓고 샤워를 했다. 아, 살 것 같다. 여전히 춥긴 하지만. 하루종일 먹은 것도 별로 없이 힘들게 등산을 했지만 생각보다는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갑자기 피자가 먹고 싶어진다.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별이아빠에게 피자 좀 사오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오래 기다리지 않아 피자를 들고 들어온다. 피자를 먹고 양치를 하고 바로 따뜻한 침대속으로 쏙 들어갔다.
아, 행복해라...
10.
끙... 끙...
아이고 미끄러워...
설핏 잠든 꿈쏙에서도 산을 내려오느라고 애 많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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