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교외를 나가보지 않아도 가을이 깊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의 투명함으로, 또 창밖으로 보이는 남산의 색깔 곱게 드는 단풍으로.
몇 년 전까지 해마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를 찾아오는 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지금부터 꼭 2년 전 가을, 암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투여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천성적으로 긍정적인 사고와 밝은 성격탓인지 회복을 해서 올해에는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고 즐겁게 지내왔다. 통화할 때마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언니가 서울까지 나오기는 힘드니까 나보고 언니한테 오라고, 오면 차로 모시고 다니면서 좋은 데 구경시켜준다고 꼭 오라는 말을 여러 번 했었는데 대답은 넙죽넙죽 하고 - 사실은 그때마다 갈 생각은 했었다 - 결과적으로 한 번도 가지 못했다.
남산의 나무색이 살짝 변했다는 것을 깨닫고 올해도 언니를 생각했다. 그리고 엊그제 토요일, 무슨 일이 있어도 언니한테 가리라는 결심을 하고 아침일찍 전화를 했더니 날벼락같은 소리를 한다.
지난 달, 암이 재발해서 항암치료에 들어갔는데 체력이 딸려서 치료하다가 중도 포기, 지금은 열이 심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열이 왜 오르는지 검사를 더 해봐야 안다고 한다는... 좀 건강해지면서 다시 올랐던 체중도 41키로까지 빠졌다고 처음에는 보기 흉하니 오지 말라, 거리가 너무 머니오지 말라 하더니 나중에는 오면 얼굴보고...좋지... 한다.
미아역에서 인하대병원까지 꼭 2시간이 걸려서 도착. 언니가 너무 반가워한다. 큰언니(언니의 언니)는 곧 죽을 것 같더니 병원에 오니 살아나는 것 같다고, 내가 오니 기분이 좋아졌다고 한다. 몇날 며칠을 아무 것도 못먹었는데 내가 있는 동안 호박죽을 종이컵으로 반 컵을 먹고는 배가 부르다고 노래를.. 체력이 떨어져서 항암치료는 포기하고 대체의학병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경주에 있는 병원에 11월 8일에 입원하는 것으로 예약을 하고 병원비도 송금했다고.
재발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다가 중도포기하고 집에 들어가서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보내준 책 몇 권에서 대체의학에 대해 읽고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을 하고 나니 다시 희망이 생긴다고,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집에 돌아오기 위해 병원을 나설 때 큰 언니와 함께 나왔는데 언니의 상태를 묻다가 알게 된 사실. 2년 전 언니는 이미 병원에서 몇 개월 살지 못한다는 판정을 받은 말기 상태였었고 그 사실을 형제들이 언니에게는 감췄기 때문에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살았다고 한다. 그 살 수 있다는, 건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몇 개월 못살거라는 언니가 2년동안 살아 있었고 나도 언니가 건강해졌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래서 5년만 넘기면 완치 판정을 받고 같이 늙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랬는데 우연히 언니가 그 상황을 다 알게 되었고 그 충격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다시 재발을 했다는 것이다. 나도 언니가 재발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큰언니의 말이 더 충격이었다.
2년 전 그때,언니 얘기만 듣고 말았는데 큰언니에게 좀 자세히 물어볼 것을.. 그랬다면 한참 건강하게 지낸 올 한해동안을 그냥 허송하지는 않았을 것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 언니가 2년 전 그때처럼 희망을 가지고 다시 기적을 이루어 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래도 천성적으로 밝고 긍정적인 언니가 또다시 희망을 갖고 또 한번의 기적을 이루어내기를 간절히 바란다.
운동삼아, 일광욕하러 복도 끝 쪽으로 같이 나가보니 창으로 햇살이 화창하게 들어오고 창밖으로는 인천항과 배, 바다가 보인다. 햇살 가득한, 눈부신 곳에서 찍었는데 정작 저장된 사진은 햇살도 없고 우울하다. 마치 내 마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