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오래 살았다. 만 25년.
매번 결혼기념일을 대충 넘어가기 일쑤였지만 올해는 그래도 25주년이라고 하니 뭔가 의미있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 지난 2월엔가 가족 여행을 구상해봤었다. 3월 말이면 별이도 제대해 오고 이 때가 지나면 별이도 바쁠테고 가족끼리 여행하기는 적당한 때라 생각해서 4월에 여행하는 걸로 알아봤더니 이미 제주 항공권 예약이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며칠 인터넷을 뒤지며 찾아보고 있는데 별이 아빠가 올해 직장을 그만둬야 하니까 직장을 그만두고 홀가분하게 가는게 어떠냐고 해서 중단..그러나 2학기부터는 별이도 복학해서 학교에 다녀야 할테고 뭐, 기약 없게 되어 버렸다.
막상 기념일 당일은 재성이가 와서인선이쪽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터라 어제 저녁이나 먹을까 생각했는데 별이도 별이아빠도 나도 딱히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어서 망설이다가별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늦게 귀가한다는 소리에 그냥 아파트 입구 맥주집에 갔다.
날이 더워지는 요즈음, 운동하고 집으로 가는 길은 어찌나 목이 마른지 늘 맥주생각이 간절했었다.
별이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내려가서 시원한 맥주와 모듬소세지를 시켰다. 칼로리 압박! 별이에게 카톡으로 있는 곳을 알려주었더니 소세지를 다 먹어갈 즈음에 도착. 별이가 좋아하는 치킨을 시키고 같이 맥주 한 잔씩을 먹었다. 맥주가 싱겁다는 별이 아빠 때문에 나중에 소주도 한 병 시켜서 두 남자가 나눠먹고. 나는 섞이면 머리아플까봐 맥주만 2잔을 먹었다.
평소에는 성격상, 또 바빠서 대화하지 못했는데 맥주를 한 잔 하면서 이러 저러한 이야기들을 많이 했다. 군대 다녀오니까 생각이 바뀌더라는 얘기도 하고 엄마가 보기에도 달라졌다는 얘기도 하고. 그러나 앞으로 더 달라져야 할 부분들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러니까 평소에 하고 싶었던 잔소리를 한 셈이 된 것이지. 그래도 맥주 한 잔 하면서 하는 얘기는 집에서 하는 얘기와는 조금 다르게 들리는 것도 같다. 셋이 대화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듣는 애는 하나에 어른이 둘이라 애 입장에서 싫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쁘게 생각하면 둘이 잔소리를 해대는 꼴일 수도 있으니까. 하긴 시어머니 살아계셨을 때는 셋이 잔소리를 했겠지. 그래도 별이가 착해서 무엇보다 역지사지 하는 아이라 잘 들어준다. 물론 나도 평소 잔소리하지 않으려고 많이 참지만.어쨌든 잔소리로 들을 수 있는얘기도 잘 받아들이고 서로 대화하는 시간이 참 좋아서 우리 한 달에 한 번은 맥주 한잔씩 하자! 고 했더니 좋다고 한다. ^^
자식이란 어릴 때는 그저 예쁘고 커갈 때는 기대가 되고 커서는 대화가 되고 그래서 좋다. 딸이라면 애교도 있고 착~ 감기는 재미가 있겠지만 아들은 또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워서 좋다. 이제는 내가 기댈 만하고 나를 보호할 수 있을 만큼 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는동안 걱정과 스트레스가 없는 순간은 없겠지만 지금부터 별이가 결혼을 하기 전까지가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남이 끼어들지 않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마지막 기간... 아무리 기대를 낮추고 서로 잘한다고 해도 며느리는, 혹은 사위는 남 아니겠나. 서로 조심해야 하는 어려운 관계. 이제 별이와 함께 할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을 것이다. 서로에게 좋은 기억으로 추억으로 남도록,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도록 잘 지내고 싶다.
맥주집에서 일어서려고 하니까 별이가 봉투를 하나 내민다. 어버이날이라고. 열어보니 8만원이 들어 있다. 제대하고 와서는 용돈달라는 말 안하고 아르바이트하러 다니더니 아마 제가 번 돈을 어버이날이라고 준비한 모양이다.
작년까지는 카네이션을 사왔는데올해는 꽃은 안사오고... 사실 꽃이비싸서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사지 말라고 하지 않은 것은 받아서 중요한게 아니라 그날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지금은 함께 사니까 별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독립을 하고 사는게 바빠질 때, 챙기지 않아 버릇하면 챙기지 않아도 되는 걸로 여기고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러면 나는 늙은 마음에 서운할테고... 늙으면 자식 얼굴 보기만 손꼽아 기다릴텐데.
사실 별이는 초, 중, 고 수학여행 때마다 뭔가 선물을 사왔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아르바이트 했다고 아빠한테 거금들여 닥스지갑도 선물하고 그랬는데 현금을 받은 건 처음이라. 기분이 참 묘했다. 요즘 아르바이트하러 다니는 거 보면서 마음이 짠했는데... 받은 8만원으로 뭘할까? 뭘 살까? 꼭 뭔가를 사서 별이가 처음으로 벌어서 준 돈으로 산 거라는 이름을 지어놔야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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